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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아침] 먼저 나에게 친밀하자

지역뉴스 | 외부 칼럼 | 2021-10-29 10:34:09

행복한 아침, 김정자(시인·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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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자(시인·수필가)

 

완연한 가을이 들어서기에는 가을 걸음이 더딘 것 같다. 설익은 가을날에 돌아본 인생길은 잠시 잠깐의 꿈결같은 여행이었다. 젊음이 팽팽했던 그날들이 엊그제 같은데 조만간 종착 역에 내릴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 유일한 여행의 기회였고 아무런 연습없이 생방송으로 시작해서 그야말로 생방송으로 막을 내린다. 시작부터 죽음을 숙고하며 여행길에 올랐던 것이라서 마지막 무대에 서서 후회없는 소풍길이었다고 거리낌 없이 떳떳하게 말하고 떠날 수 있으려나. 예고 없이 갑자기 노년으로 들어선 것 같은 현실과 친밀해지기까지에는 달리던 시속과의 타협과 수정이 요구되듯 향방과 가치를 재조정해야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거부감 없는 부담감으로 한동안을 서성거렸으니까. 빈둥지증후군에서 겨우 벗어나면서 더 이상의 경제활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책임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자유가 편안하게 받아들여지기 까지 숱한 관점과 자아의 언덕들이 들판처럼 되어가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유능한 부모로 살지 못했음에 대한 면구스러움과 죄책감이 불쑥 불쑥 치밀어 오르고, 마치 잃어버린 시간을 다시 찾은 것 같은 황당함이 노년을 보채고 흔들어대고 부추기기도 하더니만, 지금부터다, 늦지 않았다며 귓속에 맴돌 만큼 들쑤셔댄다. 은근히 기다려왔던 Retire를 환영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느지막 황혼녘 자유를 귀한 기회로 받아들이며 누려보자는 다그침과는 달리 여상스런 흐름의 일부로 단정하고 수용하기가 잡도리하듯 되조른다. 허허롭다는 속삭임으로. 육신의 생채 구조와 기능이 쇠퇴되고 시대에 반영되는 생각까지 겪어보지 못한 생소함에 직면하면서 낯가림이 시작되고 매사 속도감이 떨어지고 세상과 맞서던 기력도 줄어들고 방치된 것 같은 서글픔까지 끼어든다.

노년에 접어들면 젊은층과의 대화 기회는 당연히 줄어든다. 초라함을 드러내는 것 같아 뒷걸음질 하기도 하고 ‘내 나이가 어때서’를 되뇌이며 뻔순이로 일관해보기도 한다. 나이를 일상에서 밀어내자고 작정하고부터는 반죽이 좋아졌다. 예민해질 만큼 심각한 일인데도 그럴 수도 있지가 쉬워지고 왜라는 의문부호가 성가스럽다. 자기 표현에 미숙한 경향이 있지만 주책이라 치부받더라도 저질러 보자는 마음이 슬금슬금 앞지르기 시작한다.

움츠러들지 말자고 낯선 환경도 즐기듯 쉽게 다가서자고 밀어붙이기 처신을 수행하기로 했다. 거울을 보며 눈동자를 굴려가며 헤죽헤죽 웃기도하고 개구진 표정을 만들어 보기도 한다. 그러노라면 한껏 즐거워지고 은연 중 자신감이 솔솔 주변을 맴돌기도 한다. 필요 충족의 분위기를 감지하고도 쭈뼛거리며 나서지 못하는 나를 사랑하자고 부추겨본다.

노구를 인정하고 자신에게 먼저 친밀해지는 습관을 붙들어 보자고 귓속말로 전갈을 건네준다. 나이 든다는 것과 전면전 치르듯 나를 극복하는 계기의 시작으로 여태껏 살아보지 못했던 새로움에 도전하는 용기 발산이 요구되는 시점이라 종용하듯 들쑤셔보기도 한다. 내면의 평화로움을 지닌 노년기로 다듬어 가기 위해 시간을 넉넉하게 열어 놓기로 했다. 

태평양을 건너온 이후의 치열했던 삶의 흔적들이 퇴행성 관절염처럼 묵은 통증이 되어 켜켜에 먼지처럼 쌓여있다. 진통제로 풀어질 고질도 아니지만 아름답게 잘 살았노라고 훈장 하나쯤 얻은 마음으로 걸어온 통로를 가려(佳麗)함으로 승화시켜보자.

그러노라면 남은 날들이 더욱이 아름다울 수 있을 것이라는 충동질로 미묘한 회한들이 마법처럼 심성을 추켜세워준다. 살아온 날들이 남은 날들의 스케치를 획책하듯 북돋우어 준다. 흔적의 잔재나 결과의 귀추에는 진원의 몰입을 두지 말며 삶을 느끼고 새롭듯 조명해보는 일에 집중하자. 은은한 순리로 받아들이며 운둔해 버릴뻔했던 나를 풀어주자. 쉼 없이 치열해야 한다고 다그치며 채찍질해오지 않았던가. 종착역이 얼마 남지 않은 간이역에서 허리끈도 조금 느슨하게 풀어주며 초조하게 달려왔던 나에게 친밀하게 다가서자. 긴 여정 동안 견디어온 숭고한 순간들이 고유의 심유한 깊은 향내가 되어 남은 날 동안에라도 충만을 맛보게 해줄 것이라는 기대감을 붙들자고 두 손을 깍지 끼어본다.

비록 겉은 후패하고 낡아지고 보잘 것 없지만 생애를 바친 껍데기의 빈 충만이라도 아름답기를 바램해 보는게 떠나는 길손의 여린 바램이요 순리요 질서가 아닐까. 얼마 남지 않은 선물 같은 시간 앞에 한아함을 어떻게 누려야할지 당혹스럽기도 하지만 남겨질 흔적들의 초라함과 고인 울음을 펴놓을 자리가 깊고 그윽했으면 좋으련만. 

이도 저도 쉽지 않음이라서 먼저 나에게라도 친밀하자고 물수제비 뜨듯 잔물결 파문처럼 생을 일구자며 화이팅을 외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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