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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아침] 더 낮은 곳으로

지역뉴스 | 외부 칼럼 | 2021-10-08 09:55:11

행복한 아침, 김정자(시인·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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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자(시인·수필가)

 

지인 몇분과 식사를 나누고 차도 마시면서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한국 대선을 지켜보는 입장 차이, 영감님들 신상털기, 건강 먹거리며 운동 이야기까지 질펀하게 대화를 나누고 헤어졌다. 

화기로운 분위기에서 돌아오는 길인데 왠지 모를 허전함이 밀려든다. 알지못할 무언가가 누락된 것 같은, 정의할 수 없는 적적한 흐름이 고여있는 것 같다. 막막한 상태의 거북스럽고 구체적이지 않은, 특정 자극이나 사건에 연연할 만큼 쉽게 촉발될 것 같지도 않은 애틋한 감정 찌꺼기가 이빨에 끼인 이물질처럼 찜찜하게 마음 귀퉁이에 도사리고 있다. 코로나 블루가 아닐까할 만큼. 뾰족한 도리가 없다싶은, 꺼림칙한 언짢은 느낌을 접어둘 수 밖에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자 먼저 마음읽기부터 시작했다. 아직 개운하지 않다싶어 차타후치 강줄기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 오랜만에 만난 물안개 자욱한 강풍경이 낯선 듯 경이롭다. 하얀 겹을 이루며 격랑으로 뒤척이며 흐른다. 산책로가 열려있고 강 기슭을 따라 물질을 하고 있는 오리떼들의 자맥질이 한가롭다. 햇살이 퍼진 후에야 강태공들도 물살이 급해보이는 강줄기 한가운데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물가에 서면 물의 불변성이 보인다. 물의 본질은 맑고 깨끗하다. 인간이 더럽혀서 오염된 물도 시간이 지나면 깨끗함으로 돌아가는 것이 물의 속성이다. 자체만의 깨끗함을 간직해온 것이 아니라 만상을 깨끗하게 정화시켜주며 아래로 아래로 겸양의 미덕으로 유유히 흐른다. 수량이 불어나도 다투지 않으며 경사가 급하면 급한대로 흐르고 완만한 물길이면 넉넉한 흐름세로 흐른다. 흐르다 고이면 저수지든 호수든 넘치도록 채워주고는 다시 흘러간다. 개울이 시내로 흘러들어 강을 이루고 강은 다시 바다로 흘러든다. 물길 따라 만물을 포용하고 생명을 키워낸다. 대기 순환으로 구름이 생성되고 구름은 비가 되어 땅을 적시고 다시금 흐르고 흘러 바다로 모여든다. 물의 본성은 삶에 시달려 숨가빠하는 이들을 보듬어 주기도 하고 꿈을 안고 세상으로 나갈 수 있도록 인과율로 작용하기도 한다.

강가 풍경은 언제나 겹겹이 이야기를 품고 흐른다. 인류 역사도 강을 바라보며 꿈을 꾸고, 강 곁에서 문명 발상의 시초가 꿈틀거렸고 강 유역에서 인류의 꿈이 꽃을 피워온 것이다. 강가로 밀려드는 물결을 보며 시간을 읽어내고 바람소리는 먼 이야기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강 기슭에선 고운 모래톱이 포슬포슬 물결닮은 무늬를 연신 만들어내고 있다. 쌓여가는 모래 무덤을 잔 물결이 밀어내고 다시금 결을 만들고 물결은 모랫결이 만든 시간의 결을 지우며 흐르고 맴돌기를 거듭한다. 모랫결을 밀어내는 물결 흐름이 곰살맞다. 

강바람 소리는 악기 없이도 악보를 그려내고 강물 흐느낌은 애상을 작곡하고 있다. 가을 정취가 살포시 깃드는 강변 운치가 발라드 풍의 악곡이 연주되고 있는 듯하다. 흐르다 구비치고, 맴돌며 인생을 노래하는 강변이라서 자유로운 악상이 날개를 단듯 강변 노래가 흐르듯 익숙한 듯 들려오는 것 같다. 강물 흐름새를 지켜보며 쉼표를 얻어낸 기분이다. 어디로부터 흘러들었는지, 흘러오는 동안 낯선 지경을 스쳐오면서 담아낸 이야기들, 알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가야 하는 미지의 호기심을 담고 가야할 끝 없는 이야기들이 물결을 일구면서 흐르고 흘러간다.

‘모닥불 피워놓고 마주 앉아서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 인생은 연기 속에 재를 남기고 말없이 사라지는 모닥불 같은 것. 타다가 꺼지는 그 순간까지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 

별빛아래 피어오른 감미로운 로망이 온통 낭만으로 푸르기만 했던 시간들이 뽀얗게 떠오른다. 강가에 서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기쁨에 겨운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절망과 고뇌를 강물에 풀어버리기도 하고, 생의 허무함을 강물에 가만히 띄워 보내기도 했는데 강물 따라 흘러 보낸 노랫말이 어찌된 셈인지 강 상류로부터 위로와 격려를 싣고 오는 것 같다.

하지만 강물이라해서 마냥 부드럽고 유순한 모습만 지녀온 것은 아닐 터. 강물의 노래에는 얼룩으로 자리잡고 있는 멍울도 상처도 있었을 것이라서 마치 치유 받고 싶은 노랫말들을 거두어줄 것 만 같은 위로를 붙들고 강가에서 노래를 만들고 불러온 것 것이리라. 

나를 지탱해 온 사유의 흐름이 영원으로 흐르는 마음의 강물이 되어 노구를 숨쉬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 주어줄 것이다. 

남은 날의 내 삶도 사유의 강물이 되어 시간의 늪을 향해 고요하게 저물어 가기를 염원해 본다. 흐르는 강은 인류의 젖줄이었고 생사고락 마디에서 매듭을 풀어주고 푯대를 바라보라고, 멈추지 않고 흐르는 강물 이야기를 귀담아 들으라 한다. 

거북스럽고 맥빠졌던 무기력의 여울을 낮은 곳으로 흐르라는 강물의 위안과 격려로 하여 마음껏 흘러 보낼 수 있었다. 아래로 아래로,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흘러가기로 다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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