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자 앤터니 티슬턴의 명저, “두 지평(The Tow Horizons)”이란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두 개의 서로 상반된 시각이 하나로 융합되는 학문의 세계를 일컬어서 <두 지평>이라 명명하였습니다. 본 시편 116편의 저자는 작자미상입니다. 그러나, 그 문체와 특징을 살펴보자면 너무나 쉽게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1절과 2절이 그 해답입니다. “야훼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이 표현법은 흡사 시편 23편의 표현과 같습니다.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야훼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시23:1~6)
본 시편의 저자, 다윗(?)은 <두 지평의 기도>를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1절과 2절은 그 평행구조를 이루는 시구가 18절과 19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1절과 2절의 두 지평의 시각은 “환난 중에 기도하라!”는 것이고, 18절과 19절은 “구원의 날에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공통분모는 환난과 구원의 날이 기도로 융합이 되어져 있다는 다윗의 탁월한 견해를 엿볼 수 있습니다. 환난은 어려운 시절, 캄캄한 때를 말한다면, 구원은 광명의 세상, 밝고 환한 때를 말합니다. 어둠과 빛은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없지만, 영적인 어둠과 영적인 밝음은 기도로 동일선상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이 다윗의 탁월한 영적 혜안입니다. 어둡고 답답하여 눈앞이 캄캄할 때도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지팡이와 막대기가 되어주셔서 그 사망의 골짜기를 벗어나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기쁨과 환희로 감사의 절정에 도달하여 있을 때 구원의 감격으로 믿음, 소망, 사랑의 보상을 반드시 해주시겠다고 언약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두 지평(The Two Horizons)”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인간의 생각과 달라서 그 생각을 감히 가늠할 수 없다고 이사야는 선포하였습니다.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6) 어찌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의 지평에서 융합할 수 있을까? 그것은 단 한 가지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우리가 환난날에 기도하면 그 간구와 기도를 외면하시지 않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우리가 구원 받아야 할 구원의 날에 기도하면 그 간구와 기도를 반드시 들어주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겠다는 넓으신 마음(Broad Mind)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평생을 기도로 무릎으로 살았던 위대한 영적인 믿음의 선배 가운데는 영국을 <말씀과 기도>로 종교개혁을 일으킨 요한 웨슬레가 있습니다. 그가 존귀하게 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결정적인 이유는 자신을 십자가 앞에 쳐서 무릎을 복종시킨 <철저한 겸손>에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종아리를 스스로 채찍질한 영적 체크 리스트가 있었는데 가장 큰 질문 두 가지를 항상 하였습니다. “너는 항상 기도하고 있는가”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항상 기뻐하고 있는가?”입니다. <두 지평의 기도>를 할 수 있었던 다윗은 이 겸손함으로 “평생 기도”하면서 살았습니다. 이 겸손함으로 평생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CORAMDEO, In the psence of the Living God) 참 기쁨을 잃지않고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환난 때에, 고통의 순간에, 슬픔과 아픔의 날에 기도하라!
구원의 날에, 기쁨과 환희의 순간에, 벅차오르는 감격의 날에 기도하라!
<두 지평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면전에서 할 수 있는 자가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