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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의 세상읽기] 청산되지 않은 미국의 병

지역뉴스 | 외부 칼럼 | 2021-01-15 10:10:46

권정희,논설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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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6일 연방의회 공격사건은 미국을 되돌아보게 한다. 미국에서 수십년 살아도 우리 같은 외국 태생에게는 닿지 않는 어떤 정서가 이 나라 안에 분명히 있다.

 

돌아보면 석연치 않은 일들이 많았다. 트럼프가 대선 캠페인 때부터 특히 강조한 것은 이민 봉쇄였다. 멕시코 이민자들을 강간범에 마약범으로 몰아붙였고, 몇몇 이슬람 국가들에 대해서는 비자발급 자체를 금지했다. 이민제한, 이슬람 테러리스트 잠입차단이라는 명분이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그의 언사는 너무 거칠었고, 거칠수록 그의 지지층은 열광했다. ‘이민’ 특히 ‘유색인종 이민’이 그들을 묶는 어떤 촉매역할을 했을 수 있다.

 

트럼프는 경주마 이론 신봉자이다. 우수한 유전자는 보존하고 열등한 유전자는 제거함으로써 종을 개량한다는 우생학의 기본이론이다. 평소 ‘좋은 유전자’를 자랑하던 트럼프는 캠페인 중에도 자주 언급했다. 대부분 백인 지지자들로 메워진 유세장에서 “여러분은 좋은 유전자를 가졌다. 유전자가 거의 다 정하는 것 아니냐? 경주마 이론, 여러분 믿지 않아?”라고 외쳤다. 지지자들은 환호했다. ‘유전자’로 주고받는 그들만의 눈짓이 있는 것이다.

 

트럼프는 노회한 사업가이다. 그가 ‘이민’을 공격하고, ‘유전자’를 들먹이며, 2017년 샬롯츠빌 백인우월주의 시위대를 ‘아주 좋은 사람들’이라고 두둔한 것은 그것이 장사가 되기 때문이다. 백인 마음대로 하던 좋았던 시절에 대한 향수, 오바마 등 유색인종의 득세를 눈꼴시어하는 정서가 대다수 보수백인들의 의식 저변에 깔려있고, 트럼프는 이를 활용했다.

 

이런 시대착오적 정서의 시작은 한 세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의 원죄인 노예제도와는 별도로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병적 정서가 끈질기게 살아서 유령처럼 고개를 들곤 한다.

 

1세기 전 맨해턴에 매디슨 그랜트라는 상류층 인사가 있었다. 자연보호주의자였던 그는 야생생물에 해박했고 멸종위기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던 그가 ‘멸종’을 인종에 접목하면서 백인민족주의 물결은 시작되었다.

 

1890년대 월스트릿에서 변호사로 일하던 그는 거리의 남루한 이민자들에 주목했다. 미국의 역사도 모르고, 시민으로서의 자질도 없는 저들이 계속 밀려들면 미국을 세운 북부유럽 백인 인종은 결국 사멸하게 되리라는 데 그는 생각이 미쳤다. 그는 당시 유행하던 우생학을 버무려 1916년 ‘위대한 인종의 소멸(The Passing of the Great Race)’이라는 책을 냈다.

 

그의 주장의 핵심은 위대한 백인혈통을 지키려면 당장 이민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민자들을 다 받아들여서 멜팅팟을 만들면, ‘진짜 미국인’들은 수적으로 밀리고 혼혈로 혈통이 더렵혀져서 결국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이민은 ‘(백인)인종 자살’이라는 것이었다.

 

‘위대한 인종 …’은 미국 엘리트사회에 폭발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뉴욕타임스 등 유력지, 테디 루즈벨트, 워렌 하딩, 캘빈 쿨리지 등 전 현직 대통령, 대다수 연방의원들의 격찬이 쏟아졌다. 그 결과 바로 다음해 중국인 등 아시아계와 중동계 이민 전면금지법이 제정되고, 1924년 대대적 이민제한법이 만들어졌다.

 

그랜트의 열렬한 팬은 해외에도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그의 책을 ‘성서’라며 극찬했다. 이후 나치가 행한 유태인 대학살과 무관할 수 없다. 우생학의 대표적 신봉자로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꼽힌다. 그는 백인의 인종적 우수성을 철저히 믿는 백인민족주의자였다. 차별과 억압, 잔혹한 린치를 견디다 못해 60년대 흑인민권운동이 폭발하기 전까지 미국사회에서 백인우월주의는 의심의 여지없는 ‘정상’이었다.

 

우생학도, 그랜트의 ‘인종 자살론’도 오래 전에 구시대의 유물로 잊혀졌다. 하지만 청산되지는 않았다. 그러니 죽지 않고 맥을 유지한다. 음지에 숨어있던 백인우월주의자들이 지금처럼 활개를 치게 된 데는 세 가지 요인이 꼽힌다. 첫째는 오바마 대통령 취임이다. 미국 인종주의의 종식으로 우리가 환호했던 ‘최초의 흑인 대통령’은 다른 한편에서는 분노의 발화점이 되었다. 보수 백인들 사이에서 분노의 공감대가 폭넓게 형성되었다.

 

둘째는 트럼프의 출현이다. 오바마에 대한 극우진영의 적개심을 거름삼아 등장한 트럼프는 줄기차게 백인우월주의를 감싸는 듯한 태도를 보였고, 백인우월주의자들은 기세등등하게 전면에 나섰다. 셋째는 소셜미디어이다. Q어넌 등 온갖 거짓정보, 음모론을 퍼트리는 소셜미디어가 이들 어두운 세력의 세 규합과 확산의 발판이 되었다.

 

18일은 마틴 루터 킹 목사 기념일이다. 1963년 워싱턴 대행진 때 그가 했던 ‘나에게는 꿈이 있다’ 연설의 진짜 제목은 ‘정상 - 다시는 안 된다’였다. 차별과 억압 등 이제까지 정상으로 여겨진 것이 더 이상 정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었다. 21세기 우리의 ‘정상’은 어떠한가. 청산되지 않은 것을 분명하게 도려내야 역사는 전진한다. ‘백인우월주의’라는 말은 더 이상은 언급도 되지 않는 사어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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