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적인 규모로 근로자의 단체들을 조직하기 위한 주요한 첫 노력의 결과 1869년 '고귀한 노동기사단(The Noble Order of the Knights of Labor)이 탄생했다. 원래는 이는 필라델피아의 의류 부문 근로자들에 의해 조직된, 의체에 치중하는 비밀 단체였는데, 후에 흑인, 부녀자 및 농민들을 포함하는 모든 근로자들에게 개방되었다. 이 단체는 서서히 성장하여, 마침내는 1885년에 단행한 파업에서 철도왕 제이 굴드를 위압하는 데에 성공할 수 있을 정도까지 되었다. 이 일이 있은 후, 한 해 사이에 50만 명의 근로자가 이 단체에 새로 가입했다.
하지만 이 '노동기사단'은 곧 쇠퇴하게 되어, 노동운동에서 이 단체가 차지했던 자리를 미국 노동기사단(American Federation of Labor: AFL)이 점차 차지하게 되었다. 이전에 시가아(cigar)문호를 모든 근로자들에게 개방하지 않고 숙련근로자들에게 추점을 두었다. 그가 추구한 목표는 임금 인상, 근로시간 단축, 그리고 근로조건 개선 등 "순수하며 단순하며" 정치에는 관심이 없는 것들이었다. 이같은 목표를 추구한 결과, 곰퍼즈는 노동운동의 방향을 초기의 노동지도자들이 신봉하던 사회주의적 견해의 노선으로부터 돌려놓는 것을 도왔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목표들과, 그들이 추구하는 것들을 부여하는 데에 대한 자본가들의 소극적 태도는 서로 충돌하여 미국 역사에서 가장 광폭한 노동쟁의를 빚어냈다. 이같은 첫 노동쟁의는 10퍼센트의 임금 삭감에 반대하여 전국의 철도 근로자들이 파업을 단행한 1877년의 대철도파업이었다. 파업을 와해시키려는 기도는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시, 일리노이주 시카고시,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시, 뉴요크주 버팔로시, 그리고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시 등 서너 도시들에서 폭동과 광범한 파괴를 유발했다. 마침내 파업을 끝내기 위해 연방군 병력이 몇몇 지점에 파견되어야만 했었다.
이로부터 9년 후, '헤이마키트'광장의 사건이 일어났다. 이는 시카고에 있는 매코믹 수확기 제작사회에서 진행중인 파업에 대한 논의가 벌어지고 있던 회의장에 누군가가 폭탄을 던짐으로써 일어난 사건이었다. 이어서 벌어진 난투 끝에 9명이 죽고 약 60명이 부상했다.
다음은 1892년 펜실베이니아주 홈스티드에 있는 카네기 제강소에서 벌어진 폭동이었다. '제강·철강주석 노동자 통합협회'가 단행한 파업을 와해시키기 위해 이 회사측이 고용한 300명의 사설탐정들이 총살당해 10명이 죽었다. 그 결과 주방위군이 투입되었고, (파업중인 노조원들 대신) 비로조원 근로자들이 채용되었으며, 마침내 파업은 와해되었다. 그후 1937년까지도 이 회사는 노조가 이 제철소에 다시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2년 후, 시카고시 바로 교외에 자리잡은 '풀먼 팰리스 카'회사가 임금을 삭감함으로써 미국철도연맹의 지원을 받는 파업이 벌어졌다. 이 파업은 이내 미국 전역의 여러 철도들과 연대를 맺었다. 사태가 악화하자, 이전에 철도회사 변호사였던 법무장관 리처드 올니는 철도를 개통시키기 위한 기도에서, 파업중인 철도 직원 대신에 300명의 직원을 임명했다. 이에 이어 노조의 철도 운행 방해를 금지하는 한 연방법원의 명령이 뒤따랐다. 이에 따라 폭동이 일어나자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현지에 연방군 병력을 투입했고, 파업은 드디어 와해되었다.
가장 투쟁적이고 파업을 자주하는 노조는 '세계국제로동자'(IWW: International Workers of the World)였다. 서부의 광업계에서 보다 나은 근로조건 획득을 위해 투쟁하던 노조를 규합하여 결성된 IWW는 1903년에 그들이 콜로라도주 광산에서 벌였던 노동쟁의와, 이 쟁의를 진압하는 둘도 없이 무자비했던 방식으로 해서 특히 두드러진 존재가 되었다. 공공연하게 계급투쟁을 부르짖는 IWW는 1912년 매사추세츠주 로렌스에 있는 한 방직공장에서 벌였던 힘든 파업에서 승리한 후, 많은 지지자를 얻었다. 하지만, 제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때에 IWW가 작업중단 운동을 벌인 결과 정부가 IWW를 탄압하게 되어, IWW는 사실상 파괴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