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0년대에 연방주의자들과 반(反)연방주의자들 사이에 조성된 갈등은 미국 역사에 심오한 영향을 미쳤다. 부유한 슈일러가(家)에 장가든 알렉산더 해밀턴이 이끄는 연방주의자들은 항구들의 도시중심적인 상업적 이익을 대표했고, 토마스 제퍼슨이 이끄는 반(反)연방주의자들은 농촌과 남부지역의 이익을 대변했다.
이들 대립하는 두 파 사이의 논쟁은 중앙정부의 권한과 이에 대립하는 주정부의 권한에 관한 것이었는데, 연방주의자들은 전자에 찬성했고, 반면 반(反)연방주의자들은 주의 권리를 창도했다. 해밀턴은 상업과 공업의 이익을 추구하는 강력한 중앙정부를 추구했다. 그는 공적 생활에 능률, 질서 및 조직에 대한 '사랑'을 심어 놓았다. "국가의 신용을 적절히 뒷받침"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라는 하원의 요구에 호응해서, 그는 공공경제 뿐만 아니라 능률적인 정부에 관한 원칙을 마련하여 이를 뒷받침했다. 해밀턴은 미국은 공업발전, 상업 활동 및 정부의 운용을 위해 신용을 얻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미국은 또한 국민의 전적인 신뢰와 지지를 받아야만 한다고 말했다. 국가의 채무상환을 거부하거나 그 일부만을 상환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해밀턴은 국가 채무의 전액 상환뿐만 아니라, 연방정부가 주들이 독립전쟁 기간 중에 짊어진 미상환 채무까지도 인수하는 계획을 주장했다.
해밀턴은 또한 전국 각 지방에 지점을 설치할 권리를 가진 미국중앙은행을 고안해냈다. 그는 독립조폐국을 설립할 것을 발의했으며, 새로 탄생한 기업체들을 임시로 보호함으로써 경쟁력을 갖춘 국가의 산업 발전을 촉진시키는 것을 도울 수 있다는 일종의 "유치산업" 보호 이론을 내세워 관세제도에 찬성했다. 연방정부의 신용을 확고부동하게 만들며, 연방정부가 필요로 하는 모든 세입을 이에 주는 조치들은 상업과 공업을 고무했으며 중앙정부를 강력히 지지하는 튼튼한 실업인력을 만들어냈다.
토마스 제퍼슨은 지방분권 체제의, 농업에 중점을 두는 공화국을 창도했다. 그는 대외관계에 있어서는 강력한 중앙정부의 가치를 인정했으나, 다른 여러 면에서는 강력한 중앙정부를 원하지 않았다. 해밀턴의 커다란 목표를 보다 효율적인 조직체였으나, 반면 제퍼슨은 "나는 너무 활력적인 정부에는 찬동하지 않는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해밀턴은 무정부 상태를 두려워했고 질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반면, 제퍼슨은 자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국은 이 두 가지 영향력을 모두 필요로 했다.
이 두 사람을 가졌다는 것은 미국의 행운이었으며, 미국은 조만간 그들의 철학을 융합하여 조절할 수 있었다. 제퍼슨이 국무장관으로 취임한지 얼마 후에 일어난 이들 두 사람 사이의 충돌은 헌법에 대한 새롭고 지극히 중요한 해석을 내리게 했다. 해밀턴이 중앙은행 설립을 위한 자신의 법안을 내놓았을 때 제퍼슨은 이에 반대했다. 주의 권리를 신봉하는 사람들을 대변하여, 제퍼슨은 미국헌법은 연방정부에 속하는 모든 권한을 명백히 열거하고 있으며, 그 밖의 다른 권한은 이를 명백히 주에 유보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중앙정부에는 어디에서도 은행을 설립할 권한이 부여되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해밀턴은 중앙정부의 권한에 관한 필요한 세부 사항들이 방대하기 때문에 엄청난 수의 (중앙정부의) 권한들이 (헌법의) 일반적인 조항들에 의해 함축적으로 표시되어야 했고, 또 그 같은 조항들의 하나가 (중앙정부에게) 구체적으로 부여된 다른 권한을 의회에 부여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헌법은 중앙정부에게 세금을 부과, 징수하고, 채무를 상환하며, 자금을 차입할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중앙은행은 이러한 기능을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다. 그러므로 의회는 그 함축된 권한에 따라 그러한 은행을 설립할 권한이 있다는 것이었다. 워싱턴 대통령과 의회는 해밀턴의 견해를 받아들였으며, 연방정부의 권한을 확대해석하는 하나의 중요한 선례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