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
살다 보면 삶의 속도가 제어할 수 없을 만큼 빨라질 때가 있다. 최근의 내 일상이 그랬다. 시간절약을 위해 촘촘히 짜놓은 스케줄을 좇아서 하루하루를 달리다 보니,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돌아볼 겨를조차 없었다. 계기판의 속도계만 보며 앞만 보고 질주하던 어느 날 오후, 내 삶에 경고등이 번쩍하는 빨간 불빛으로 다가왔다.
그날도 머릿속으로 다음 일정을 가늠하며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아차, 하는 순간 눈앞에 붉은 '스탑' 사인이 나타났다. 뒤늦게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이미 차는 정지선을 조금 지나쳐 멈추어 섰다. 그리고 이내 백미러 너머로 ‘삐오 삐오’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경찰차가 나타났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경찰관이 차창으로 다가왔을 때, 나는 미리 운전면허증을 꺼내 들고 창문을 내렸다. 변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내 부주의를 인정하는 것이 먼저였다. "미안해요, 내가 스탑사인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어요." 면허증을 건네며 이실직고하니, 나를 엄격하게 바라보던 경찰관의 눈빛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내 신원을 확인하고 돌아온 그는 단호하지만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다음부터는 꼭 완전히 멈추셔야 합니다. 이번엔 워닝만 드릴 테니 조심하세요."
멀어져 가는 경찰차의 빨간 미등을 보며 참았던 숨을 길게 몰아쉬었다. 긴장이 풀리자 당장 거액의 벌금을 면했다는 안도감과 함께, 오늘 참 운이 좋았다는 기쁨이 밀려왔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차분히 생각해보니 이는 단순한 요행이 아닌 것 같았다. 쉼 없이 달리기만 하던 내 일상에 때맞춰 브레이크를 걸어준 경종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날 이 작은 경고가 없었더라면 나는 여전히 정신없는 스케줄에 눈이 먼 채 계속 액셀을 밟아댔을 것이고, 언젠가 돌이킬 수 없는 큰 사고를 맞닥뜨렸을지도 모른다. 호된 대가를 치르기 전 스스로를 자제할 기회를 얻었으니, 이 따뜻한 경고야 말로 바쁜 삶이 내게 베푼 뜻밖의 행운이자 선물인 것 같았다. 가슴 속으로 잔잔한 안도의 한숨과 감사가 교차했다.
언젠가 스탑사인에 숨겨진 ‘인지 과학의 법칙’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사람의 눈에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시야가 급격히 좁아지는 '시야 협착' 현상이 있다고 한다. 시속 60km만 되어도 운전자의 시야는 정지 상태의 3분의 1로 쪼그라든다. 속도를 줄이고 슬슬 움직이는 것도 같은 결과라고 한다. 서행하는 상태에서도 좁아지는 시야 탓에 사각지대에서 다가오는 보행자나 차량을 순간적으로 놓치기 십상이다. 오직 완전히 멈추는 순간, 즉 속도가 정확히 '제로‘가 되어야 비로소 사람의 시야가 다시 180도 전체로 활짝 확장된다고 했다.
생각해보면 내 삶의 스탑사인 앞에서도 나는 늘 슬금슬금 움직였던 것 같다. 겉으로는 쉬어 간다고 말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다음 스케줄을 굴리고 있었고, 마음의 속도를 완전히 제로로 만들지 못했다. 그러니 마음의 시야가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속도에 눈이 멀어 내 곁의 소중한 사람들, 계절의 변화, 그리고 내 영혼의 지친 숨소리 같은 삶의 사각지대들을 모두 놓치고 지나쳤을 것이다.
"속도를 제로로 줄이세요. 그리고 좁아진 마음의 시야를 다시 넓혀 당신의 삶을 똑바로 바라보세요."라는 경고를 전하러 온 고마운 존재, 그날의 경찰관은 어쩌면 내 바쁜 일상에 브레이크를 걸어주기 위해 찾아온 삶의 전령이었는지도 모른다. 앞으론 속도가 완전히 멈추어야만 비로소 주변의 위험이 똑바로 보인다는 이 과학적 사실을 내 인생의 거울로 삼아야겠다.
자동차도, 인생도 계속 달릴 수만은 없다. 제대로 멈출 줄 아는 사람만이 시야를 확보하고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갈 수 있다는 사실, 내게 날아온 그 따뜻한 '워닝'을 마음에 새겨본다. 이제는 정신없는 스케줄에 밀려다니지 않으리라. 내 삶의 붉은 스탑사인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기꺼이 브레이크를 밟아 내 삶의 속도를 제로로 만들 것이다. 그리하여 내 영혼의 시야가 내 삶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도록 잠시 숨을 고르고, 주변을 둘러보리라.








![[수필] 속도 제로의 발견](/image/294771/75_75.webp)
![[전문가 칼럼] 보험, 그것이 알고 싶다 : 주택보험은 왜 집값이 아니라 ‘재건축 비용’으로 가입할까?](/image/294770/75_75.webp)
![[모세최의 마음의 풍경] 잊혀가는 6, 25 한국 전쟁](/image/294583/75_75.webp)
![[재정칼럼] 천경태의 은퇴를 지키는 쇼셜시큐리티 인사이트-은퇴와 생활의 기초를 지키는 가장 현실적인 제도 읽기 (13)](/image/294646/75_75.webp)
![[삶과 생각] 끝없는 배움의 여정](/image/294582/75_75.webp)
![[수필] 찌그러진 소묘](/image/294581/75_75.web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