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
데생 클래스에서 강사님이 회원들에게 그림 한 장을 들어 보여주었다. 전 권사님이 그려낸 핸드 그라인더 소묘였다. 그 그림은 한마디로 파격적이었다. 전통적인 규칙인 평행이나 원근법은 완전히 무시되어 있었고, 사물의 각도와 균형도 사정없이 깨져 있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제멋대로 그려놓은 것처럼 비뚤어지고 찌그러진 형태였다. 세부 표현 기법을 가르치는 강사님의 시선으로 보면 기술적인 기본기와는 거리가 먼 그림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반듯하게 잘 그린 그림들 사이에서 그 스케치는 단연 독특했다. 찌그러진 소묘를 보는 순간, 눈을 뗄 수 없는 묘한 매력이 뿜어 나왔다. 나도 모르게 “어머나, 너무 멋져요” 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강사님조차 그 매력에 푹 반해버렸다고 고백했다. 그 순간 문득 화가 피카소가 떠올랐다. 평생을 바쳐 원근법을 부수고, 결국에는 어린아이처럼 그리는 법을 배우는 데 평생이 걸렸다고 했던 그의 파격이 전 권사님의 스케치북 위에 그대로 겹쳐 보였다. 자로 잰 듯 정확한 형태보다, 그 비뚤어진 선들이 보여주는 날것의 생동감이 더 강력한 예술이 될 수 있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 규칙을 깬 소묘 한 점에 감동받고 보니, 문득 내 글을 읽으며 공감해 주던 독자들이 생각났다. 사실 나는 평생 문필가들의 견고한 문장력을 기준 삼아, 내 글은 늘 촌스럽고 부족하다는 열등감을 품어왔다. 가끔 독자들이 보내는 찬사 앞에서도 온전히 기뻐하지 못하고, 그저 다정한 인사치레려니 하며 밀어내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규칙을 무시한 전 권사님의 스케치에 내가 이토록 진심 어린 감탄을 보내면서, 내 투박한 글에 보내준 독자들의 공감 역시 계산 없는 진심이었다는 생각이 비로소 들었다.
원근법을 벗어난 소묘 한 장이 큰 울림을 주었듯, 화려한 문체가 아니어도 덜 익은 내 글 속에서 누군가는 삶의 진정성을 읽어내었던 것이리라. 매끄럽게 잘 그려진 수많은 그림보다 삐딱한 소묘 한 점이 내 마음에 와 닿았던 것처럼, 독자들 역시 내 글에서 자신과 닮은 삶의 무늬를 발견하고 위로를 얻었을지 모른다. 오늘 우연히 만난 스케치 한 장이, 나의 오랜 열등감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하는 징검다리가 되어주었다.
어릴 적 나는 책 읽기를 좋아하던 문학소녀였다. 그러나 자라서는 문학과 무관한 학문을 공부했다. 일과 가정 그리고 양육에 치여 내 안의 문학소녀는 서서히 잊히는 듯했다. 그러다 불쑥 찾아온 병마로 죽음과 맞서는 투병 생활을 하게 되었다. 숨을 쉬는 것조차 기적 같았던 시간을 통과하며 삶의 귀중함을 뼈저리게 배웠고, 죽음의 문턱에 서보고 나서야 비로소 나 자신에게 솔직해질 수 있었다. 그때 다시 찾아온 글쓰기는 내 삶의 가장 아끼는 선물이 되었다.
그렇게 다시 시작한 글쓰기였지만, 여전히 기성 문인들의 세련된 문장 앞에서는 주눅이 들곤 했다. 그랬다. 글을 완벽한 표현의 경연으로 보면 나는 영원히 아마추어일 것이다. 하지만 삶의 진실을 비추는 거울로 보면, 전 권사님의 비뚤어진 그림처럼 내 투박함도 나만의 독창적인 빛깔이 될 수 있다. 문장이 조금 거칠면 어떤가. 유수한 세련미는 없을지언정, 그 안에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길어 올린 나만의 인생이 담겨 있을테니까. 이제 나는 남의 매끄러운 글과 비교하며 위축되기보다, 내 안의 다듬어지지 않은 날것의 이야기에 당당한 자부심을 가지려 한다.
화려한 문체를 부러워하며 주저하던 마음을 오늘로 기꺼이 내려놓는다. 전 권사님의 독특한 스케치가 그 자체로 빛나는 그만의 예술이 되었듯, 남들의 평가를 떠나 내 자신에게 가장 솔직해질 수 있는 내 글도 이 세상에 하나뿐인 작품이 되리라 믿는다. 그리하여 오늘도 나는 내게 허락된 소중한 하루를 원고지 위에 당당하게 적어본다. 이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건져 올릴 수 있는, 투박하지만 가장 솔직한 나만의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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