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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내 인생에 대한 예의

지역뉴스 | 외부 칼럼 | 2026-03-30 10:32:10

수필, 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내 인생에 대한 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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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

 

이솝 우화의 ‘여우와 신포도’ 이야기는 우리에게 익숙한 자기 합리화의 전형을 보여준다. 배고픈 여우가 높은 가지에 매달린 포도를 따려다 실패하자, “저 포도는 분명 실거야”라고 외치며 돌아서는 장면이다. 자신의 능력 부족이나 실패를 인정하기보다, 목표물에 결함이 있다는 구실을 만들어 자존심을 지키려는 지극히 인간적인 방어 기제다.

하지만 이어령 박사가 재해석한 현대판 ‘신포도’ 이야기는 전혀 다르다. 기어코 그 포도를 따 먹은 여우가 타인의 부러운 시선 때문에 입안을 찌르는 신맛을 견디며 미소 짓다가, 결국 위궤양에 걸리고 만다는 설정이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가짜 단맛’을 연기하느라 정작 자신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가는 현대인의 모습이다. 남의 시선과 물질적 기준에 연연하며 자신을 소모하지 말고, 진정으로 선택해야 햐는 삶이 무엇인가 하는 가르침이다.

이 글을 접하고 처음에는 웃음을 터트렸으나, 이내 서늘한 질문 하나가 마음속에 고였다. ‘과연 나는 어느 쪽의 여우인가.’ 남들이 우러러보는 권세나 재물이 내 손에 닿지 않을 때, 그것을 당당히 ‘신포도’라 부르며 돌아설 용기가 내게는 있었는가? 혹여 체면과 겉치레라는 넝쿨 아래서 타인의 기준에 나를 끼워 맞추느라, 정작 ‘나’라는 고유한 존재를 잃고 있던 것은 아닐까?

인생은 흔히 죽기 전까지는 끊임없는 비교의 과정이라 말한다. 그러나 사람은 공장에서 틀에 맞춰 찍어내는 기성품이 아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저마다의 결을 지닌 유일한 존재다. 광활한 우주 속에 단 하나뿐인 내가 사라진 세상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직 한 번뿐인 생이기에 우리는 스스로 근사해질 권리가 있으며, 무엇보다 ‘나답게’ 행복하게 살아내야 하는 엄중한 의무가 있다.

유럽을 제패했던 나폴레옹은 생애 전체를 통틀어 행복했던 날이 단 6일뿐이었다고 회상했다. 반면 시각과 청각을 모두 잃은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헬렌 켈러는 “내 생에 행복하지 않은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라고 고백했다. 결국 행복이란 객관적인 성취나 조건이나 환경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내면의 시선에 달려 있음이 명백하다. 

물론 본능적인 욕심을 버리는 일이 쉽지는 않다. 스스로를 절제하지 않으면 더 많이 갖고 싶고, 더 높이 오르고 싶은 욕망이 시시때때로 고개를 든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은 밖에서 채우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길러내는 옹달샘과 같다. 고요한 밤을 무사히 보내고 아침에 눈을 떠 숨을 쉴 수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음에 감격하는 태도. 그렇게 물처럼 부드럽게 흐르는 마음의 평온을 누리는 것이 행복의 실체라고 믿는다.

흔히 나이가 들수록 행복도가 높아진다고 한다. 아마도 삶의 신포도를 억지로 삼키지 않아도 되는 지혜를 체득하는 과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오직 내가 즐거운 일을 도모하고,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며, 스스로의 부족함마저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태도. 행복은 그것을 찾으려 사방을 헤매는 사람보다, 이미 곁에 와 있는 소소한 기쁨의 씨앗을 발견하는 사람의 뜰에서 더 무성하게 자라기 마련이다.

세상이 보내는 박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가슴속에서 뛰는 내 심장의 박동 소리에 집중해 본다. 입안을 헐게 만들었던 가짜 단맛들을 과감히 뱉어내고, 내 마음의 밭에 나만의 씨앗을 심고 싶다. 비록 그 열매가 남들이 보기엔 작고 투박할지라도, 오직 나만이 느낄 수 있는 온전하고 진실한 단맛을 즐기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 말로 단 한 번뿐인 ‘나’라는 인생에 대한 가장 예의 바른 태도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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