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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가을과 겨울 사이

지역뉴스 | 외부 칼럼 | 2025-11-17 10:48:19

수필, 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가을과 겨울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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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

 

계절의 끝과 시작에는 늘 비가 내린다. 가을비에 밀려 여름이 떠나는가 싶더니, 어느새 코끝에 찹찹한 바람을 몰고 온 가을이 문턱을 넘었다. 낙엽이 깔린 뒷마당에서는 미처 겨울 양식을 비축하지 못한 듯, 청설모 두 마리가 상수리나무를 오르내리며 서두르고 있다. 부채 같던 잎사귀를 모두 털어 버린 무화과나무는 이제야 자신의 민낯을 여실히 드러냈고, 키 큰 소나무들의 푸른 위용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뽕나무도 잎들을 노랗게 물들이고 나서야 비로소 그 존재를 드러냈다. 

삶의 한 페이지가 끝나고 다음 페이지로 책장을 넘기는 기분이 든다고 해야 할까. 가을과 겨울 사이, 이상하게도 소소한 일상에서도 감동을 받는다. 한 해 동안 땀 흘린 것에 대한 보상처럼, 가을은 단풍이라는 알록달록함으로 자연을 물들여 놓고 "올 한 해도 참 잘 살았다"는 뿌듯함을 안긴다. 자연이 베풀어준 풍성함에 대한 고마움으로 충만해진 느낌 덕분인지 다가올 겨울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비축해 둔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진다. 

가을과 겨울 사이, 마치 채움과 비움이 서로 바통을 주고받는 것 같은 두 계절의 사이에서는 인생의 철학을 재정비해야 할 것 같은 책임감을 느낀다. 가을의 넉넉함이 물질적인 채움이었다면, 겨울의 문턱은 내면을 다독이고 욕심을 정리하는 비움을 시작해야 하는 시간 같다. 바깥에서 무언가를 채우기보다, 내게 꼭 필요한 것만 남기고 채움에 대한 집착을 비워내라는 과제를 받은 학생처럼, 해내지 못하면 자책해야 할 것 같은 자연의 섭리를 가을의 넉넉함 속에서 깨닫는다. 

계절의 변화에서 삶의 궤적을 돌아보는 사람이 어찌 나 혼자뿐일까 마는, 가을의 빛깔이 사라질수록, 지난날의 기억들은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죽어도 잊지 못할 것처럼 가슴 아팠던 이별들이 문득 떠오르면, 까맣게 잊고 살아왔음에 스스로 놀란다. 단풍은 길 위에서 바스라져 낙엽이 될 것이고, 짧아진 햇볕은 세상의 색을 삼키듯 금방 어둑해지며 세상의 온기는 조금씩 사라지고 마는 두 계절의 사이에서 채움과 비움을 생각해 본다. 

풍요의 아름다움 뒤로 슬그머니 다가올 텅 빈 모습의 겨울, 내 인생의 시기를 계절에 비추어 본다면 딱 이즈음이 아닐까. 바쁜 길 떠나듯 서둘러 내 곁을 떠난 이들과 떠나보낸 인연들, 아팠던 이별의 순간들이 기억 속에서 문득문득 걸어 나온다. 어쩌면 내 인생도 그들의 시간들처럼, 풍성했던 계절을 마치고 곧 겨울의 초입에 들어설테니 이제는 쉬면서 인생을 관조해야 할 때라고 조용히 말해주는 것 같다. 

올 가을엔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부쩍 자주 난다. 몇 달 전 해리 할아버지가 양로원에 입소한 후부터 더욱 그렇다. 해리 할아버지는 기억의 지속력이 겨우 2분 정도다. 게다가 주위 사람을 모두 도둑 취급하는 공격적인 치매 환자다. 하지만 따님과 전화할 때만큼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함박웃음을 귀에 걸고 말투까지 나긋나긋해지는 '딸 바보' 아버지가 된다. 치매 할아버지의 그 모습을 보면서 회한으로만 간직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다시금 떠올리며 웃는다. 

내 인생의 겨울은 어떤 모습일까. 직업상 만나는 노인들의 모습에서 노인이 된 내 모습을 예측해 볼 때가 있다. 젊은 시절의 인생사가 오롯이 드러나는 그들의 노년을 보면서, 나의 노년은 저들과 다른 모습일 것이라는 거라 믿었던 어리석은 마음을 비로소 인정한다. 그들과 다른 내 인생이었으니 나의 노후는 다를 거라는 막연한 믿음, 그것이 오만했음을 깨닫는다. 바삐 사느라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은 기억도 잊고 살았던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이제 곧 다가올 차가운 계절을 생각해 본다. 

자연의 섭리처럼 흐르는 삶의 유한함을 다시금 깨닫는다. 가을과 겨울 사이에서, 지난날을 추억하고 현재를 관조하는 이 순간이야 말로,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가장 소중한 의미와 사랑을 되새기는 성숙한 시간이 아닐까. 더 늦기 전에 이런 깨달음을 얻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이 깨달음을 잊지 않고, 곁에 있는 이들에게 온전히 집중하는 삶으로 남은 계절을 채워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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