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애틀랜타
첫광고
김성희 부동산
이규 레스토랑

[수필] 한 잔의 차와 아침 사이

지역뉴스 | 외부 칼럼 | 2025-11-10 11:12:20

수필, 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한 잔의 차와 아침 사이

권순상 노흥성 부동산 470-218-6136표정원 융자미국 크래딧 교정

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

 

찻물 끓는 소리는 언제나 마음을 안정시킨다. 식구들이 모두 집을 나선 아침,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분주했던 아침 일과가 대충 마무리되면 비로소 찻물을 올린다.

 

마당에 내린 아침 햇살을 바라보며 한가로이 마시는 차는 마음을 정화한다. 값비싼 다기 세트가 아니어도, 격식을 갖춘 다도의 예가 없어도 나를 탓할 이는 아무도 없다. 한 줌 찻잎을 넣은 다관에 끓는 물을 붓고, 담황색으로 우러나는 찻물을 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마음이 차분해진다. 가끔 집안에 가득 내린 정적을 깨고 싶어 장난스럽게 다관을 높이 들고 찻잔을 겨냥해 찻물을 따르며 혼자 웃기도 한다. 

 

따스한 찻잔에 입술을 대고 천천히 한 모금씩 마시다 보면, '지금 내 삶에 이 이상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하는 만족감에 젖는다. 어릴 적 중년이 된 나를 상상했을 때, 그 시기의 내 인생엔 무언가 이룬 것들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지금 내 삶은 지극히 평범하고 단순하여 내세울 만한 것이 없다. 긴장과 도전, 이익과 손해, 오해와 미움 같은 것들에 흔들리지 않고 살려 했던 희망 덕분에 단순할 수 있었던 삶이었다. 

 

작은 이익에 현혹되지 않고자 노력했던 나의 삶에 만족한다. 그 덕분에 딱히 내세울 성과 없는 내 인생 노트는 여전히 여백투성이다. 끊임없이 미래만을 향해 당겨지는 자석 같았던 나의 이십 대는 오래전에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졌고, 푸른 하늘을 우러러보며 인생을 창조하겠다는 야무진 꿈으로 설레던 나의 삼십 대는 가정과 모성애라는 울타리 안에서 바깥쪽만 바라보다가 떠나갔다.

 

긴 병치레로 인해 인생의 한 부분을 잃은 것에 대한 보상심리처럼,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불혹의 삶은 조급했다. 누가 알까 숨겨왔던 애환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가슴을 짓누르기도 했다. 하지만 지나간 일들은 관조하는 것 외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느새 찻물이 식었다. 차 한 잔을 더 마시려 부엌으로 향하다가 창밖을 내다본다. 파란 하늘에는 바람이 스쳐 간 길목을 따라 구름이 흘러가고, 나무 가지 끝에는 빛바랜 잎사귀가 대롱거린다. 잎을 떨어뜨리고 드러낸 나목들이 보이는 썬룸에서 차를 마시며 얻는 평화로움과 행복감에 취해서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순간이라는 생각을 한다.

 

흐드러지게 핀 꽃잎도 때가 되면 떨어지듯이, 인간사 또한 마찬가지다. 늘 곁에 있을 줄 알았던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가고, 그토록 아끼던 젊음도 건강도 세월 앞에서는 스러질 수밖에 없다. 바람에 실려 가는 구름과 한낱 인생이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렇게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면서 느끼는 소소한 행복, 그 즐거움이야말로 한 잔의 차와 마주하는 이 시간을 각별하게 아끼는 이유다.

 

행복이란 현재를 즐기는 하나의 순간이 아니라 경험의 총계라고 한다. 스스로 행복하려는 의지가 있다면 때때로 감정적인 고통을 겪더라도.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미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조급하지 말자. 현재의 즐거움을 포기하지 말자. 미래만을 위해 너무 많은 시간을 투자하면 결국 지금 누리는 행복을 놓치게 된다. 천천히 물들이는 찻잎처럼 조금씩 내 삶을 나만의 빛깔로 물들이며 사는 것이 가장 나답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진정 내 속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 그것을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구절이다. 후회 없는 삶을 희망하며 미래를 바라기보다는 지금 한 잔의 차로 행복함을 즐기는 아침이다.

 

댓글 0개

의견쓰기::상업광고,인신공격,비방,욕설,음담패설등의 코멘트는 예고없이 삭제될수 있습니다. (0/100자를 넘길 수 없습니다.)

[내 마음의 시] 소식 없이 온 가을
[내 마음의 시] 소식 없이 온 가을

헬렌김 그렇게 뜨거웠던 어제도아무런 작별 인사 없었는데,오늘은소식없이 가을입니다. 공원에는 다람쥐가 분주하고한 여름 푸르렀던 나무들은파스텔을 거두어하나 둘 황금빚 옷을 준비합니다 

[애틀랜타 칼럼] 체면을 살려 주어라

이용희 목사 대개 윗사람들은 아랫사람을 대할 때 하인 다루듯이 명령하기도 하고 책망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그런 식으로 사람을 대할 때. 그 자신의 인격이 땅에 떨어지는 것을

[법률칼럼] 취업비자 10만 달러의 벽… 이제는 회사의 해고 기록까지 본다

케빈 김 법무사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취업을 준비하는 유학생에게 채용 제안은 새로운 출발이다. 그러나 지금은 취업의 기쁨에 앞서 비자 정책의 불확실성부터 따져야 한다.지난 9월

[행복한 아침] 가을 달 빛이 가장 좋은 밤

김 정자(시인 수필가)   바람결도 싱그러운 가을 밤이다. 추석 명절이 다가오면 어쩔 수 없이 고국, 고향으로 마음이 달려간다. 명절 속에 잠재워져 있었던 일가친척, 이웃, 동무들

[재정칼럼]   천경태의 은퇴를 지키는 쇼셜시큐리티 인사이트 -  은퇴와 생활의 기초를 지키는 가장 현실적인 제도 읽기 (25)
[재정칼럼] 천경태의 은퇴를 지키는 쇼셜시큐리티 인사이트 -  은퇴와 생활의 기초를 지키는 가장 현실적인 제도 읽기 (25)

SSI 생계보조금 50년 만의 대수술 예고: 자산 한도 1만 달러 상향과 은퇴계좌 5만 달러 면제사회보장국 수리통계국 공식 추산: 3,160억 달러 투입과 수급 자격 대폭 완화 개

[모세최의 마음의 풍경] 소프라노 김현정 독창회
[모세최의 마음의 풍경] 소프라노 김현정 독창회

최 모세( 고전 음악·인문학 교실) Duluth 120 Hway Rd 선상의 미국인 “제일 침례교회”에서 지난 토요일 오후 4시에 소프라노 김현정의 독창회가 있었다. “노래는 본래

[신앙칼럼] 가을이 들려주는 소리: 창조의 파도소리에 귀 기울여보라!

방유창 목사 혜존(몽고메리 사랑 한인교회) Listen to the Waves of Creation! (로마서 Romans 11:36) 시인 윤동주는 시 <바다>에서 이

[삶과 생각] 독서의 계절 가을
[삶과 생각] 독서의 계절 가을

지천(支泉) 권명오 (수필가 / 칼럼니스트) 70년 전 한국에서 중·고등학생 시절 가을이 오면 국어 선생님은 “가시리 가시리 잇고, 버리고 가시리 잇고, 날러는 엇디 살라하고, 버

[추억의 아름다운 시] 옹달샘

서정태 지금은 아무도 찾지 않는질마재 몰랭이그 어디쯤 해서옹달샘이고 싶다 미침 바람이 불어싸도물결이 일지 않는그저 조용하기만 다만한자락 바람이 쉬어가고밤이면 몇 개 별이 적시는옹달

[전문가 칼럼] 보험, 그것이 알고 싶다 : 부모와 자녀가 함께 살면 보험도 함께 점검해야 한다
[전문가 칼럼] 보험, 그것이 알고 싶다 : 부모와 자녀가 함께 살면 보험도 함께 점검해야 한다

최선호 보험전문인 미국에서는 성인이 되면 부모 곁을 떠나 독립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부모 집으로 다시 돌아와 함께 사는 자녀들이 크게 늘고 있다. 이를 흔히 **'

이상무가 간다 yotube 채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