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턴은 저쪽 끝에 앉아 있었고, 힐러리는 이쪽 구석에 있었죠. 우리는 치열하게 선거 전략을 논의하고 있었습니다.” 미국 대통령을 비롯해 수많은 정치인의 ‘수석 여론조사 담당관’으로 일했던 한 인사의 말이다. 미국 대선이 진행 중인 지금, 이러한 강연이 자주 열린다.
9월 10일, 카멀라 해리스 민주당 대선 후보와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 간의 첫 대선 토론이 끝난 후, 여론조사 결과 해리스 후보가 트럼프 후보를 앞선다는 소식이 뉴스에 보도됐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러한 수치를 단순한 뉴스로 소비하며, 여론조사를 그저 누가 앞서고 뒤처지는지를 보여주는 도구로만 인식한다.
그러나 여론조사는 그저 시작일 뿐이다. 더 중요한 것은 수치 뒤에 숨겨진 유권자들의 생각을 읽고, 이를 바탕으로 ‘메시지 개발’을 통해 후보의 지지율을 상승시키는 것이다.
그레천 휘트머 미시간 주지사의 선거 캠페인은 이를 잘 보여준다. 휘트머의 여론조사팀은 미시간 주민들이 가장 걱정하는 문제가 열악한 도로 상태라는 사실을 파악했다. 한 유권자는 암 투병 중인 아들을 병원으로 데려가는 길에 도로가 너무 안 좋아서 타이어가 펑크 나 제때 병원에 도착하지 못한 경험을 털어놓았다. 이 일로 차체도 휘어져 수리비가 수천 달러에 달했다고 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휘트머는 도로 상태가 유권자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체감하게 됐다.
휘트머는 여기서 중요한 선거 전략을 구상했다. 캠페인 슬로건을 “Fix the Damn Roads”(제기랄, 도로나 고치자)로 정했다. 이 강렬하고 직설적인 메시지는 유권자들이 겪는 일상적인 불만을 정확히 짚어내며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휘트머는 주지사로 당선됐다. 바로 이런 전략적 결정을 내리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여론조사 담당관’이다.
휘트머의 여론조사팀은 유권자들의 의견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포커스 그룹’을 운영했다. 그 과정에서 유권자들이 도로를 고칠 때 ‘제대로 된 재료’를 사용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부실 공사에 대한 불만이 컸던 것이다. 이를 반영해 휘트머는 TV 광고에서 “제기랄, 도로나 고치자”에 이어 “제대로 된 재료를 사용하자”라는 문구도 추가했다. 유권자들의 마음을 섬세하게 파악하는 것이 정치인의 핵심 과제이며, 이를 돕는 참모들의 역할이 캠페인의 성공을 좌우한다.
미국의 선거 문화는 한국과 여러 면에서 다르다. 한국에서는 선거 관련 영화들이 주로 부패한 정치인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러나 미국에서 선거는 사회 전반에 걸쳐 자리 잡은 제도다. 필자가 참석한 강연에서 전문가들은 정치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뉴스만 보는 것에 그치지 말고, 실제 선거 캠페인에 참여해 실전 경험을 쌓을 것을 권장했다. 이는 올바른 선거 문화를 정착시키는 데 기여할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체제를 직접 경험하고 자신의 사회적 비전을 실현할 기회를 제공한다.
여론조사의 진정한 힘은 단순한 숫자에 있지 않다. 그 숫자를 어떻게 해석하고, 이를 통해 어떤 전략을 세워나가느냐가 중요하다. 미국 사례는 한국 정치와 선거 문화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선거와 정치 참여를 통해 민주주의를 직접 경험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이성현 하버드대 아시아연구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