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제일 감명 깊은 영화는 ‘마음의 행로(Random Harvest)’다. 마지막 장면에서 기억상실 남자가 비로소 옛집을 기억, 만개한 꽃길을 지나 물음표인체 간직하던 열쇠로 문을 열고, 아내랑 진짜로 재회한다. 이후 내 소망 중의 하나가 현관문 앞 꽃길이었다.
해서 이사 오자마자, 현관 길 양쪽잔디를 캐고 벽돌을 박은 폭 50cm 쪽 화단을 만들었다. 이 미니 꽃밭은 이른 봄, 첫 손님인 노랑 수선화에 이어 청색 히아신스가 폈다가 겸손히 스러진다.
이어 하얀 마가렛트들의 춤사위에 나비인양 꽃길을 거닐며 메밀꽃의 운치에 젖는다. 한 여름엔 서양꽃모종인 임페이션즈, 베고니아로 채웠다. 그러다 어릴 때 할머니랑 가꾼 정겹던 화단이 그리워 일년초로 대체했다.
아버지가 하늘로 가신 해엔 과꽃을 흰색으로만 심어 슬픔을 기렸는데, 개화기가 짧아 유감이었다. 엄마가 떠나셨을 땐 좋아하시던 코스모스로 장식, 추모에 잠기곤 했다.
그 다음 인연 맺은 화초가 국화과로서 10월 탄생화인 메리골드다.
옛적엔 금잔화라 불렀기에 영어이름이 Marigold구나 여겼다. 그런데 둘은 엄연히 다른 꽃으로 분류된단다. 멕시코가 원산지인 메리골드는 크게 두 가지다. 유럽으로 이주한 프렌치메리골드(만수국)와 아프리카로 이식된 아프리카메리골드(천수국)다. 별칭인 천수국, 만수국에서 짐작되듯 개화기가 6월부터 서리 맞을 때까지 길다.
몇 년 동안은 꽃송이가 테니스공 모양 둥글고 다알리아같이 소담한 천수국의 노랑이나 주황으로 통일, 단색으로 장식했다. 그러다 천수국보다 꽃은 작아도 노랑, 주황, 검붉은 색까지 어우러진 홑겹이나 겹꽃에다 가운데가 쏙 올라와 다채로운 만수국으로 바꿨다.
천수국의 ‘이별의 아픔’ ‘가련한 사랑’이란 슬픈 꽃말과 달리, ‘반드시 오고야 마는 행복’이란 특별한 꽃말에다 수명도 더 길으니까. 또 신비하게도 씨를 섞어 무작위로 뿌려도, 나름대로 ‘우량자손승계법칙’의 선택인지 각양각색의 꽃 잔치를 연다.
내가 쪽 꽃밭을 빛내줄 ‘마무리투수’로 10년도 넘게 메리골드를 기용하는 이유다. 어릴 때 꽃 선호도에서 늘 등외였던 금잔화가, 이 먼 타향에서 메리골드로 개명, 뒤늦게 내 반려식물로 등극할 줄은 몰랐다. 이렇게 30년 동안을 좋아하는 꽃들이 순서대로 피고 지니 쪽 화단은 늘 내게 행복이다.
흠이라면 자라는 여정에 툭하면 곁가지가 원줄기에서 갈라지며 부러지는 거다. 자랄 때라면 그나마 덜 아까운데 성숙해서 제 무게 때문에 부러지니 너무 애석하다. 줄기가 튼실하던 가, 감당할 만큼만 꽃을 피워야했다. 지나친 욕심의 결과다.
테이프로 붙여보고 부목을 대줘도 헛수고다. 작년에야 ‘혹시 기적이?’ 하며 훼절(毁折)된 걸 심고 보살폈더니, 오뚝이 같이 기사회생 복제됐다. 그나저나, 인간들도 삶의 무게가 버겁거나 절망적 세상살이 현실과 맞서도, 이런 식물마냥 새로운 기회창출로 재생치유 된다면, 험한 인생길도 훨씬 수월하련만...
<방인숙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