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기 세이프가드 보고서 분석
미국 가전 업체들을 보호하기 위해 미국 정부가 시행한 강력한 수입 규제 조치가 결과적으로 한국 기업인 삼성과 LG의 미국 내 위상을 더 높였다고 미 국제무역위원회(ITC)가 보고서를 통해 공식화했다. 이는 미국 정부 스스로‘보호무역의 역설’을 인정한 것으로, 향후 미국의 통상 정책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미 현지에서는 수입 규제에 맞서 발 빠른‘현지화’로 정면 승부를 한 삼성과 LG의 전략이 주효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15일 미 관가에 따르면 ITC는 최근 내놓은‘대용량 가정용 세탁기 세이프가드(긴급 수입제한 조치) 결과 보고서’에서 한미 세탁기 분쟁의 최대 수혜자로 삼성과 LG를 지목했다. 미국의 수입 규제 대상이었던 삼성과 LG가 북미 공장을 신속히 가동해 시장 지배력을 되레 크게 끌어올렸다는 것이다. ITC의 이번 보고서는 2018~2022년 시행된 세이프가드의 효과를 최종적으로 분석해 조 바이든 대통령과 의회에 보고한 것이다.
미국이 수입산 세탁기에 세이프가드를 발동한 시기는 2018년이다. 당시 삼성과 LG 세탁기가 미국 시장을 급속히 잠식하자 미 기업인 월풀이 강력한 수입 규제 조치를 요청했고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이를 승인했다. 세계무역기구(WTO)가 남용을 엄격히 제한하는 세이프가드를 미국이 발동한 것은 2002년 이후 16년 만에 처음이었다.
미국의 세이프가드는 한국산 세탁기의 연간 수출 쿼터 물량을 120만 대로 제한하고 쿼터 내에서는 14~20%의 관세를 부과했다. 하지만 이를 넘어서면 30~50%의 고율 관세를 물도록 했다. 이로 인해 삼성과 LG는 연간 1억5,000만달러 이상의 추가 관세를 부담하게 됐다. 대상 기간은 최초 3년이었으나 2021년에 다시 2년이 연장돼 총 5년간 시행됐다. 우리 정부는 2018년 WTO에 이를 제소했고 오랜 분쟁 끝에 결국 지난해 승소 판결을 받아냈다.
미국은 WTO 패소로 수입 규제의 명분을 잃었는데 시행된 기간 동안 실리도 챙기지 못했다. ITC의 최종 보고서에 따르면 세이프가드 이후 수입산 세탁기 물량은 실제로 급감했으나 그 자리를 메운 것은 삼성과 LG가 현지 공장에서 생산한 물량이었다.
ITC는 보고서에서 “미국 내 세탁기 산업 개선은 LG와 삼성, 두 신규 진입 생산자가 주도했다”며 “2018년부터 2022년까지 삼성과 LG의 세탁기 생산량은 매년 증가한 반면 이 기간 월풀과 제너럴일렉트릭(GE)의 생산량은 불규칙적으로 감소했다”고 밝혔다. ITC는 그러면서 “세이프가드가 미국 세탁기 산업의 생산 및 점유율을 높이는 데 성공했으나 가장 큰 수혜자는 국내 기업이 아닌 한국 기업 두 곳”이라고 못 박았다.
ITC가 보고서에서 밝힌 것처럼 국내 가전 기업들은 북미에 공장을 세우고 기술력을 높여 미국의 수입 규제를 무력화했다. 삼성은 2018년 1월 3억8,000만달러를 투자해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뉴베리카운티에서 미국 내 첫 가전 공장을 설립했다. 이 공장에서 처음 생산된 제품이 바로 세탁기였다.
LG전자 역시 같은 해 12월 테네시주 클라크스빌에서 세탁기 공장을 가동했다. 이어 2021년에는 이 공장의 증설을 위해 2,000만달러 이상의 추가 투자를 단행했다. 테네시 공장의 연간 생산능력은 세탁기 120만 대, 건조기 60만 대에 달한다.
이 같은 현지 생산에 힘입어 미국 내 한국 기업들의 세탁기 점유율은 꾸준히 오르고 있다. 시장조사 업체 트랙라인에 따르면 미국 세탁기 시장점유율은 지난해 기준 삼성이 23.2%, LG가 20%인 반면 월풀은 메이태그 등 자회사를 모두 합쳐야 31.7% 수준이다. 2016년 40%에 가까운 점유율을 보유했던 월풀이 정부의 보호무역 조치에도 불구하고 시장에서 지속적으로 밀려난 것이다. 삼성과 LG는 2017년 이후 각각 점유율을 3~4%포인트씩 끌어올렸다.
한편 가전 업계에 이어 반도체와 배터리 등의 분야에서도 한국 기업들은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등 미국 우선주의 파고를 넘기 위해 현지화에 사활을 걸고 있다. 삼성 반도체는 텍사스주 오스틴 공장에 이어 미국에서 두 번째로 선보이는 테일러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공장을 연내 완공할 계획이다.
<워싱턴=윤홍우 특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