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기밀문서 반출해 거래한 정황까지
처벌하지 않는 게 더 위험, 기소 의견 확산
미국은 대통령을 법정에 세운 적이 없는 나라다. 전직이든 현직이든 정상의 불법행위를 단죄하는 나라와 묵인하는 나라로 세계를 구분한다면 미국은 후자에 속한다. 이런 정치, 사법적 관행을 놓고 미국이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중대한 불법행위가 공개되면서다. 트럼프 처리를 놓고 정치와 여론이 법 앞의 평등을 내세운 사법적 단죄와 정치적 안정을 위한 불기소로 나뉘어 대치하는 형국이다.
트럼프의 불법 의혹은 알려진 것만 해도 차고 넘친다. 수사는 현재 가족 재산 조작, 1·6의회 난입 사건 그리고 퇴임 때 백악관 기밀문서 유출 등 크게 세 갈래로 진행 중이다. 전임 대통령에 대한 단죄가 없는 정치풍토에서 보기 드문 전 정권 사정이다. 사안을 들여다보면 수사하지 않을 수 없는 중대한 범죄들이다. 하지만 전방위 수사는 트럼프의 백악관 재입성 시도와 맞물려 해석될 수밖에 없다. 트럼프는 공화당 대선주자로 가장 앞서 있고 그의 지지 후보들이 당내 경선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둘 만큼 영향력도 크다. 이런 트럼프는 스스로 정치적 탄압을 주장하며 수사의 정치화를 유도하고 있다.
트럼프의 가족기업 비리조사는 그의 인생 단면을 보여준다. 3년째 뉴욕 검찰은 트럼프 일가의 탈세, 대출사기 등을 수사 중이다.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려 부동산을 매입한 뒤 파산해 부채를 없애는 방식으로 돈을 번 트럼프는 파산신청을 6번 했고 피해자들의 송사는 수천 건에 달한다. 이달 10일 검찰에 출두한 트럼프는 불법적 자산관리 의혹에 묵비권을 행사하고 검찰 밖에선 역사상 가장 거대한 마녀사냥이라고 공세를 폈다.
대선불복 사태의 연장선에 있는 작년 1월 의회난입 폭동은 트럼프의 가장 중대한 범죄다. 트럼프가 폭력 사태를 묵인, 방조한 구체적 사실은 측근들의 최근 의회 증언에서 폭로됐다. 당시 트럼프는 백악관에서 운전사를 밀쳐내고 직접 차를 몰아 의사당에 가려 했고, 폭도들이 무장한 사실을 알면서 행동을 승인했다. 무장한 지지자들을 선동해 의회의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확인 절차를 저지하려 한 것은 헌법 수호란 대통령 임무를 위배한 반역 행위다.
현재 파문을 일으킨 사건은 국가기밀 문서 유출 문제다. 사건은 이달 8일 연방수사국(FBI)이 트럼프의 플로리다 자택인 마러라고 리조트를 전격 압수수색하면서 시작됐다. 전례 없는 전임 대통령 압수수색에 정치권은 물론 미국 사회는 발칵 뒤집혔다. FBI, 법무부는 함구하고 있으나 현지 언론에 따르면, 압수된 총 11건의 문건은 퇴임하면서 트럼프가 백악관에서 무단으로 가지고 나온 것들이다. 국가안보와 직결된 핵무기 관련 문서도 포함돼 있다고 하나 FBI는 확인하지 않았다.
미 대통령기록물법은 임기가 종료되면 대통령은 공적 자산인 모든 자료를 국가문서기록관리청(NARA)에 제출하도록 규정했다. 별도 허가 없이 자료를 백악관 밖으로 반출하면 국가안보를 위협한 것으로 인정돼 간첩죄가 적용된다. 트럼프는 재임 중 국가기밀을 스스럼 없이 공개해 유사한 논란을 자주 빚었다. 트위터에 국가기밀을 올리고, 언론 인터뷰에서 핵잠수함 위치를 노출시키는가 하면 동맹이 제공한 정보를 제3국에 흘리기까지 했다. 국가안보와 직결되는 기밀 무시행태가 퇴임 이후 반복된 것이나 이번 사건에 적용될 법의 잣대는 엄격하다.
정치적 공세가 거칠어지자 법무부는 법원 승인을 받아 압수수색 영장을 일부 공개하며 정면 대응에 나섰다. 음영 처리돼 공개된 영장의 관련자 진술서는 구체적인 내용을 증언하고 있다. NARA가 작년 5월 기밀문서 유출을 인지하고 반환을 요청해 확보한 문서는 15박스 분량에 달했다. 반환 문서 가운데 1급 비밀문서 25건, 2급 비밀 92건, 3급 비밀 67건 등 모두 184건에 기밀 표식이 달려 있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친서,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후임자에게 남긴 메모 등 목록만 따져도 100페이지에 이른다고 미 언론은 전했다. 트럼프의 자필 메모, 일정과 전화번호 등의 자료도 포함돼 있는데 이런 문서들은 신문 잡지들과 뒤섞여 방치되다가 발견됐다. 기밀문서를 보안이 가능한 별도 시설에 보관하지 않아 실수나 사고에 대비하지 않은 행태 역시 실정법 위반이다. FBI는 이런 문서들이 반대 세력에 넘어갔다면 미 정보기관의 해외 정보 취득 방법, 민감한 정보원 정보까지 노출됐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문제가 꼬인 것은 FBI가 트럼프의 마러라고 리조트에 반납되지 않은 기밀문서가 보관된 사실을 파악하면서다. 트럼프의 가족 또는 측근이 문서 보관장소까지 정확히 제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몰랐던 트럼프 측은 기밀자료를 모두 완납했다며 자진반납을 거부했다. 결국 압수수색에서 11건의 문건이 추가로 나오면서 트럼프 측은 곤혹스러운 입장이 됐다.
FBI는 트럼프에게 기밀을 유출한 간첩죄는 물론 사법방해죄, 정부문서의 불법 취득·파기죄까지 적용한 상태다. 기밀문서의 유출과 반납, 강제 확보 과정을 보면 트럼프의 혐의는 분명해 보인다. 트럼프가 기밀문건을 무단 유출한 것은 징역 10년이 가능한 간첩죄가 적용될 수 있다. 문서 반납을 방해했거나, 추가 문서를 고의 은폐했다면 징역 20년의 사법방해죄도 가능하다.
마러라고 리조트를 드나든 인사들에게 기밀문서가 노출된 의혹까지 확인되면 파장은 걷잡기 힘들다. 핵무기 제조법 같은 국가안보와 직결된 최고기밀 문서들을 빼내 해외 국가에 팔려 했다는 정황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문서가 보관된 마러라고 리조트는 해외 스파이들의 표적이었다는 증언이 끊이지 않는다. 사우디아라비아 정부 인사들도 리조트에 출입해 의혹은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다.
기밀문서 유출 수사를 둘러싼 정치적 공방은 한국 사정정국 논란의 수위를 이미 넘어섰다. 트럼프는 2024년 대선 출마를 막기 위한 마녀사냥이란 프레임을 걸려고 했다. 사건 초기만 해도 트럼프는 지지세력 결집효과를 누려 대선 재출마 선언을 9월로 당길 것이란 관측이 나왔다. 하지만 범죄 의혹이 갈수록 커지면서 트럼프의 사법 리스크는 그의 정치생명뿐 아니라 공화당마저 위기로 몰고 있다.
<이태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