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반도체 법 통과로 중국 배제 신공급망 구축 ‘잰걸음’
“미국은 첨단 반도체를 생산하는 데 세계를 이끌어야 한다”, “우리가 향후 수십 년간 세계를 다시 선도할 것을 약속한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지난 9일 미국판 ‘반도체 굴기’를 위한 ‘반도체 칩과 과학법’(반도체법)에 서명·공포하기에 앞서 한 말이다. 이 법의 골자는 미국의 반도체 산업 발전을 위해 설비 증설과 연구 개발, 인력 양성 등에 총 2,800억 달러를 투자하는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이 “중국 공산당이 적극적으로 이 법을 반대하는 로비를 벌인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고 언급한 데서 주요 2개국(G2)인 미국과 중국 간 첨단기술 패권 경쟁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신냉전 구도가 펼쳐지는 가운데 그 여파가 세계 경제에도 미치고 있다. 현대와 미래 산업의 ‘쌀’로 불리는 반도체를 놓고 G2가 충돌하고 그 전선도 넓어지는 양상을 보이면서 한국의 이익을 확보할 전략 마련도 시급해졌다.
바이든 행정부는 국제 공급망에서 중국의 부상을 억제하며 세계 경제 주도권을 잡기 위한 행보에 속도를 내고 있다. 미국의 반도체 육성법에는 보조금 등 지원을 받는 기업에 대해 10년간 중국 등 비 우호국에 반도체 관련 투자를 제한하는 조항이 담겼다. 자국의 반도체 산업 진흥과 국가 안보를 내세워 중국을 고립시키려는 전략의 하나로 해석된다.
산업연구원은 ‘첨단기술의 미·중 블록화 전개 양상과 시사점’ 보고서에서 미국과 중국의 첨단기술을 둘러싼 대립이 반글로벌화의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반도체의 경우 핵심기술을 확보한 미국이 중국 기업과의 거래 제한을 확대하면서 자국 반도체 산업 육성, 우방국과의 공급망 협력을 통해 중국 견제 수위를 높이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이 한국, 일본, 대만을 끌어들여 반도체 공급망 협의체인 ‘칩4’를 만드는 방안을 추진하는 것도 그 일환이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은 미국이 반도체 핵심기술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면서 중국 반도체 산업이 신기술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중국을 포위하는 ‘디지털 만리장성’을 쌓을 것으로 전망했다.
연방 의회를 통과한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도 중국을 겨냥한 조치가 들어있다. 이는 니켈 등 전기차 배터리용 핵심 광물을 미국 또는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국가에서 조달하고, 배터리 부품을 북미에서 제작·조립하는 등 일정 요건을 충족해야 보조금을 주는 규정이다. 세계 최대 배터리 공급국인 중국의 입지를 줄이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이런 미국의 행보에 중국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고 있다. 최근 낸시 펠로시 연방하원의장의 대만 방문으로 미국과 중국 간 군사적 긴장이 고조됐고, 그 불똥이 양국 무역에도 튀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가 중국산 제품에 대한 수입 관세를 내리는 방안을 검토했지만 대만 문제로 이를 재고하기로 했다는 로이터 통신의 보도가 나왔다.
전임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미중 무역 불균형을 들어 중국산 제품에 고율의 관세를 부과했으나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물가가 치솟자 미국 내에서 수입 관세 인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G2 사이에 낀 한국으로서는 정교한 전략적 대응이 더욱 필요해졌다. 한·미 동맹은 물론 우리나라의 최대 수출시장인 중국과의 관계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미국의 반도체법, 인플레이션 감축법, 칩4 동맹은 미국 주도의 신공급망 구축 본격화를 시사한다”고 평가했다. 박 연구원은 “신공급망을 둘러싼 미·중 간 신냉전 분위기 격화 속에 한·미 간 그리고 한·중 간 교역구조의 변화 가능성과 마찰 리스크가 동시에 커졌다”고 설명했다.
경희권 산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미 반도체법 관련 보고서에서 “미·중 신냉전으로 본격화한 글로벌 산업지형 격변을 기회요인으로 활용하기 위한 대외산업기술 전략 마련이 긴요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