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포돛배 유람선이 부소산성 고란사 선착장을 출발해 바로 아래 구드래나루로 이동하고 있다. 부소산은 높이 106m에 불과하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깊고 그윽하다.
부여는 낮아서 참 편안한 곳이다. 100년 넘게 사비백제(538~660년)의 도읍이었지만, 웅장한 궁궐 하나 남은 게 없다. 주변 지형도 마찬가지다. 비산비야(非山非野), 위압감을 줄 정도로 높은 산도 없지만 끝없는 평야지대도 아니다. 고만고만한 산과 들이 있는 듯 없는 듯 금강처럼 부드럽게 이어진다. 도심에도 고층 빌딩이 거의 없어 찬찬히 둘러보면 골목마다 옛 도읍의 향기가 은은하다. 국가의 기틀을 다진 위례(한성)나 두 번째 도읍이었던 웅진(공주)에 비하면 백제의 서정이 짙게 남아 있다. 부소산성과 정림사지, 궁남지는 대표적인 백제 유적으로 공중에서 보면 일직선으로 읍내를 관통하고 있다.
삼천궁녀는 잊어라… 갈수록 그윽한 부소산성의 매력
부여 읍내의 북쪽 끝자락 부소산성은 금강(부여에선 ‘백마강’이다)과 접하고 있는 작은 산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소부리성’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지금은 세종실록지리지에 실린 산 이름을 따 부소산성으로 부른다. 산성은 웅진에서 사비로 수도를 옮기던 시기인 성왕 16년(538)에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성곽은 산봉우리를 빙 둘러싼 테뫼식과, 주변 계곡을 감싸는 포곡식이 혼합된 형태다. 군창터와 건물터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유사시에는 군사적 목적으로, 평시에는 왕과 귀족들의 후원으로 이용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산 전체가 성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에 성벽이 특별히 도드라지지는 않는다. 부소산에서 가장 높은 곳이 해발 106m, 웬만한 지역에선 동네 야산이다. 그래서 대개는 아담하고 담백하다고 표현하는데, 시조 시인 가람 이병기는 부소산을 둘러보고 갈수록 ‘아득하다’고 했단다. 규모에 비해 깊고 그윽하다는 말이다. 부소산문(매표소)에서 출발해 산 뒤편 고란사에 이르기까지 계곡과 능선을 교차하며 여러 갈래의 산책로가 나 있다. 곧장 가면 1시간도 걸리지 않지만, 삼충사ㆍ영일루ㆍ군창지ㆍ궁녀사ㆍ사자루ㆍ낙화암 등을 거치면 2시간 가까이 걸린다. 산자락 돌면 끝이겠구나 여겼는데 고갯길로 이어지고, 고개 넘으면 다시 계곡길이다.
새롭다고 하는 건 겉 다르고 속 다른 부소산의 식생 때문이기도 하다. 옛 지명인 ‘소부리’는 소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 겉보기에 부소산은 ‘소나무 산’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내부로 발을 들이면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초입부터 단풍나무가 발갛게 물들어가고, 토성 주변 계곡엔 아름드리 복자기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능선 중간의 영일루에도 단청과 단풍의 조화가 고색창연하다. 늦가을 부소산이 특히 아름다운 이유다.
산성 내부의 옛 건물을 보면 누구나 망국의 처연함에 어느 정도 감정을 이입하게 되는데, 사실 백제시대 누각은 하나도 없다. 해맞이 장소에 세운 영일루는 홍산 관아의 부속 건물이었고, 정상의 사자루는 임천 관아의 정문을 옮겨 세운 누각이다. 맑은 강물을 굽어보는 곳이라는 의미의 ‘사자루(泗樓)’ 현판은 구한말 의친왕 이강의 글씨다. 강 방향에는 서화가 김규진(1868~1933)의 작품인 ‘백마장강(白馬長江)’ 편액이 걸렸다. 백제의 세 충신(성충ㆍ흥수ㆍ계백)을 배향하는 삼충사, 낙화암에서 꽃처럼 떨어진 궁녀들의 충절을 기리는 궁녀사는 모두 현대에 세운 사당이다.
낙화암은 백마강이 발아래 내려다보이는 바위 절벽 위다. 아찔함을 뒤로하고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면 강가에 고란사가 자리하고 있다. 절 뒤 돌 틈에 고란초가 자란다고 하는데 쉽게 찾기는 어렵다. 대신 ‘고란약수’ 한 모금으로 아쉬움을 달랜다. 고란사까지 오면 대부분의 관광객은 오르막길을 되짚어 가기보다 황포돛배(편도 5,000원)를 타고 구드래나루로 돌아온다. ‘삼천궁녀’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꾸준히 지적돼 왔지만 유람선의 주제곡은 여전히 ‘백마강’이다.
정림사지 못생긴 불상은 상처받은 현대인?
부소산성과 궁남지의 중간, 부여 읍내 한가운데에 자리한 정림사는 백제 왕실의 상징적인 사찰이었다. 절터에 남아 있는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은 세련되고 창의적인 백제인의 미적 감각을 유감 없이 드러낸 문화재로 평가된다. 각 층 몸돌은 목조건물의 배흘림기둥처럼 가운데를 볼록하게 표현했고, 지붕돌의 네 귀퉁이는 새가 날개를 접고 살포시 내려앉는 모양처럼 부드럽게 들려져 우아하면서도 장중한 조형미를 자랑한다.
반면 바로 옆 보호각 안의 석조여래좌상에 대한 평가는 정반대다. 높이 5.62m의 불상은 신체 비례가 맞지 않아 한때 ‘표현이 치졸하다’(한국학중앙연구원)는 혹평까지 받았다. 받침돌, 몸통, 머리, 갓 등이 각각 따로 노는 것처럼 보여 어색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미적 기준은 시대에 따라 변하고 평가는 상대적이다. 못난이 불상은 언뜻 현대미술의 추상작품 같기도 하다. 대상을 해체해 주관적으로 재구성한 입체파의 석조 버전이다. 일상에서 상처받고 지친 현대인의 모습이 겹친다. 흐트러짐 없고 교본처럼 딱 맞아 떨어지는 오층석탑보다 천덕꾸러기 불상에 더 정감이 가는 이유다.
정림사지에서 약 1㎞를 내려오면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 연못인 궁남지다. 이름 그대로 궁궐의 남쪽에 있는 연못이라는 뜻이다. 부소산성의 왕궁이 머리라면, 정림사지는 심장, 궁남지는 배꼽에 해당한다. 삼국사기는 ‘백제 무왕 35년(634) 궁의 남쪽에 못을 파 20여리 밖에서 물을 끌어다 채우고,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고, 가운데에는 섬을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의 궁남지는 삼국사기에서 묘사한 것과 유사한 모습으로 정비돼 있다. 가운데 큰 연못을 중심으로 동심원처럼 여러 겹의 둑을 쌓고 작은 연못을 조성했다. 둑을 따라 미로처럼 이어진 산책로에는 버들가지가 늘어져 운치를 더하고, 작은 연못엔 온갖 종류의 연꽃을 심었다. 은은한 연꽃 향과 화사한 홍련은 없어도 보랏빛 수련은 아직도 군데군데 남아 있다.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하는 질문에 부여 해설사는 “이게 바로 백제인의 기술이죠”라며 눙친다. 11월까지 연꽃을 관람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관리하고 있다는 말이다.
궁남지는 백제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의 ‘서동요’ 전설이 깃든 곳이기도 하다. 연못 한가운데 포룡정에 ‘서동요’ 구절이 현판으로 걸려 있고, 동쪽 도로변에 향가를 해석한 비석이 세워져 있다. 유언비어로 남의 나라 공주를 꾀어 낸 고도의 심리전과 국경을 뛰어넘은 사랑 이야기가 동전의 양면 같다.
<최흥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