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내가 (친형제 말고) 형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셋밖에 없다. 어렸을 때도 그랬다. 위아래 따지며 위계를 받드는 자리엔 발도 들여놓지 않았다. 그런 자리는 아닌 척 해도 힘을 겨루고, 지역을 가르며, 분파를 만들기 때문에. 나는 선배들이 무슨 말을 할지 다 알았다. “내가 말이야” 하고 입을 여는 순간,“너는 내 말을 따라야 해”라는 메시지가 서라운드로 울렸다. 나를 위한다는 구실로 퍼붓는 충고는 비좁은 경험과 한 줌 지식으로 버무려진 소영웅적 헛소리일 뿐이었다. 그 격정적인 장광설과 육체적 공격성, 부주의한 어휘 선택 앞에서 꾹 참고 내면화하며 앉아 있다 보면 번번이 반질식 상태가 되었다.
가장 힘든 건 만사가 꼬여선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태도였다. “인생 뭐 있어?” “너는 그게 틀렸어” 나의 고민만으로도 세상은 충분히 암울한데, 그래서 보다 밝은 이야기로 서로 격려하고 싶은데 만나자마자 세상 다 산 듯, 모든 걸 다 아는 듯 작파한 이야기를 봄철 산패한 기름처럼 쏟아내니 견딜 재간이 없었다.
게다가 모든 핑계가 그저 그런 현재를 가리는 가면이 되었다. “시국이 이래서” “집안에 빽이 없어서” “젊은 애들 정신 상태가 글러먹었기 때문에” 남성 공동체를 버무린 자랑이 끝나고 나면 그들은 백화점에 남겨진 타잔보다 외로워 보였다. 나는 노새처럼 줄을 서서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선배들로부터 탈출해 나만의 도서관을 찾았다.
사람들은 흔히 ‘지성의 실패’라고 말하지만 나는 선배들을 통해 지성 - 사실을 관찰하고, 이성을 적용하고, 무엇이 진실인지를 추론하는 마음의 노력 - 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아무도 모르는 지식 너머로 가고 싶었다. 그러나 결코 그럴 수 없었다. 그들 역시 용렬한 선배로부터 졸렬하게 배우며 사회의 생존법을 익혔기 때문에. 뒷마당에는 머리에 기계충이 옮은 아이들이 추위에 떨고 있었기 때문에.
후배들이 가진 힘의 진액을 빨아먹고 현실 안주형 인간으로 주저앉히던 선배들은 시대의 틈새마다 입을 바꿔가며 과녁을 찾았다. 인구학적 분포도에서 불쑥 튀어 나온 디지털 토착민 세대, 자기 방에서 홀로 길러진 채 새 질서를 갈망하는 세대, 갑갑한 현재에서 미래로 점프한 세대에도 예외 없이 똑같은 말을 퍼붓는다. “나 때는 말이야.”
이젠 한국인의 절대 가치, 나이를 믿지 않는다. 연륜을 존중하되 추앙하진 않는다. 어른들은 언제나 나이와 지혜의 관계성을 의심하게 만들었으니까. 중학생보다 비대한 자아, 내려놓을 줄 모르는 아집, 사색 없이 하루를 사는 텅 빈 상태, 사회적 평등과 유동성에 오히려 꽉 막힌 시선, 차별을 겪었으면서 오히려 더 심하게 차별하는 아이러니, 신경질을 카리스마로 착각하는 해괴함, 남 얘기는 오 분도 못 듣는 주의력 결핍, 공감도 공명도 하지 못하는 타인 감수성 제로 상태.
나는 그동안 목격한 어른들의 무치함을 십 분 내로 백 개는 읊을 수 있다. 얼마 전엔 금호 역에서 예순 중반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개찰구 앞에서 태연히 가래침을 뱉었다. 거리에서든 공원에서든 침을 뱉는 한국 남자들은 나이를 가리지 않지만, 그런 광경은 또 난생처음이었다. 나는 차라리 신기한 마음으로 따졌다. “무슨 생각이면 공공 장소에서 침을 뱉을 수 있죠?” 그는 저러다 각막 다치지 걱정될 만큼 아주 오래 나를 노려보았다. 그 기억은 소중한 나의 며칠 내내 침처럼 매달려 있었다. 어른들은 요즘 아이들을 보며 이 나라에 미래가 없다고 탄식하지만 나서서 미래를 압살하는 건 오히려 그들이었다.
아직 잡지를 만들던 어느 해, ‘우리나라의 존경할만한 어른들’이라는 기획안을 보곤 머릿속이 복잡했다. 답하기 어려웠던 건 주제가 처음부터 잘못 정의되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답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 질문한다는 게 모순되면서도 슬펐다. 뱃속이 아니라 이성 깊숙한 곳에서 무엇을 행해야 할지 아는 어른, 진정한 엘리트의 세련된 자질을 보여주는 어른, 이성과 근거의 마차를 끌고 진군하는 어른, 사회적 딜레마에 대해 묻고 답을 듣고 싶은 어른, 그 사색의 음영 속에 기대고 싶은 어른은 한 명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어른은 채색된 위인전 속에 숨었기 때문에. 어쩌면 다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나이에 대한 재정의는 분명 하나의 사회 운동이 되었다. 그러나 백주에 번쩍거리는 선글라스며 메달이 절거덩거리는 군복 차림으로 활보하는 어른들을 볼 때마다 의문문이 폭발했다.
노인들이 무력하게 시들어간다는 이야기는 다 거짓말 아닌가? 성숙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거지? 나이란 실재하는 지혜와 아무 연관이 없잖아? 심지어 그들은 그 떠들썩한 에너지와 날뛰는 호르몬을 역으로 사용하고 있었지. 아무리 가슴팍에 장난감 훈장을 잔뜩 늘어뜨려도, 그 옆에 충성스러운 표정의 똘마니가 그렇게나 많아도 자제할 줄 모르는 무식함은 속이 다 보였다.
국가적 대의와 집단의 노력, 공동체 기억과 단일한 가치관에 일생을 바친 세대의 유일한 해독제는 회상이다. 그러니까 누구는 달 착륙의 영향으로 창공을 날아오르는데, 누구는 아직도 배 곯던 시절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먹지 못해 죽은 사람보다 새로운 지성 때문에 죽은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복고의 세상은 그들에게나 좋은 것. 아무리 SNS를 부하처럼 다루고 배달 앱을 능란하게 다룬다 해도, 억압이 삶의 큰 부분으로 남아 있는 한 그 옛날 암울한 천진함을 계속 동경할 것이다. 아이가 곳곳에 남긴 문법의 오류들이 일종의 향수를 주듯이. (다른 말이지만, 요즘 횡행하는 ‘꼰대’라는 말은 어른들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통행증이 되었다. 경멸은 양방향으로 통하는 탓에 윗 세대를 ‘꼰대’라 통칭하는 젊은 꼰대를 만들었다. 어른에게 멍에를 씌움으로써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도외시하려는. 그야말로 비극으로 가득한 로맨스이며, 책임 회피자들의 도덕적 희극이다.)
어느 날, 중학교 2학년 여학생 네 명이 ‘잡지사 구경’이라는 학교 과제 차 회사로 찾아왔다. 우리는 같이 편집실을 둘러본 다음 내 자리에서 던킨 도너츠를 먹었다. 햇빛이 아이들처럼 밝은 낮에 우리는 지금 행복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유머를 잠깐 섞었다. “너희들은 어른 말 듣지 마. 어른들은 다 나약한 아이들이거든. 학교 갔다 집에 왔는데 아빠가 방구석에서 술 취해 있는 거 보면 나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그런 생각이 들지?” 아이들은 미친 공감력으로 한여름처럼 웃었다. “그러니까 먼저 마음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봐. 내가 삶에 원하는 게 뭔지, 좋아하는 게 뭔지. 그리고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해.”
모두가 떠밀려가는 목적으로부터 벗어나 그 목적의 요점에 의구심을 갖는 자녀에게 부모는 어떤 대답을 해줄 수 있을까? 그날 아이들은 웃으며, 또 골몰하며 이야기를 들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모두가 그 순간을 가슴에 새겼다는 것을.
그날도 그랬지만, 아이들이라고 불리는 작은 사람들, 청소년들이라고 불리는 ‘광기 어린’ 사람들은 어느 어른들보다도 윤리적이고 상상력이 넘쳤으며 매너가 있었다. 나는 어디서건 내 앞에서 나를 위해 문을 잡아준 어른을 본 적이 없다. 갈 길이 바쁘고 뒤돌아볼 여유가 없어서라기보다 뒷사람이 문에 부딪힐지 말지가 전혀 상관없으니까. 그러나 한 달 전, 을지로 지하 주차장에서 문을 잡고 나더러 지나가라고 손짓한 청소년에겐 우리 집 서재에 있는 책을 다 선물해주고 싶었다.
주변에 존경할만한 어른이 왜 없는지에 대한 답은 내가 어른이 되어 찾았다. 나는 직장에서 긴 세월을 보냈지만 후배들에 비해 너무 미완성인 상사였고, ‘그렇게 어른은 아닌’ 사람이었다 경력은 이력서나 지저분하게 만들 뿐 역량을 말해주지 않았다. 더는 기댈 데가 없는 순간, 아무리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져도 최선이 되지 못했다. 어떤 의미로 나는 후배들에게 실존적인 반면 교사였을 것이다.
인생은 출생에서 죽음까지, 혹은 삶이 끝난 후에도 아주 오래 의미로 감싸여 있다. 생의 목표는 인식이며, 인식의 목표는 자유이기 때문에. 확실히 길고도 당황스러운 여정이다. 그러나 어른들의 벌거숭이 세상은 다층적이었던 적이 없다. 빛을 반사하지 않는 죽은 세포로 오직 흑과 백, 아군과 적, 이익과 불이익만 따지니까.
약간의 나르시시즘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은 각자 그들 분야에서 자기가 가장 이상적이며 적어도 현대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세계는 이데올로기를 논하는 핑계로 존재하니까. 그러면서 자기가 왜 맞고 상대가 왜 틀렸는지 증명하느라 평생을 보내는 것이다.
패러다임 이동의 시대에 관습적인 지식은 관습적인 무지로 바뀐다. 위대한 유산이라는 착각. 깃발 덮인 유해. 시커먼 고깃덩어리. 과거의 빛은 오직 유연함 속에서 반짝거릴 것이다. 살아 있음의 기술이란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