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러스 공포가 한겨울 추위보다 매섭다. 해남 땅끝을 찾은 지난 21일, 천년 고찰 미황사에도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소식이 속속 전해졌다. 띄엄띄엄 절간 계단을 오르는 관광객도 수시로 휴대폰을 꺼내 감염병 속보에 눈을 떼지 못했다. 올해를 ‘2020 해남 방문의 해’로 정하고 매화 축제, 달마산 힐링 축제 등을 이어가려던 해남군도 봄 축제 계획을 접었다. 이맘때가 좋으니 꼭 가보라 권하기는 더욱 어렵게 됐다. 힘든 시기 이겨내고 지친 마음 달래 줄 곳으로 저장하길 바란다.
화장기 없는 미황사에 숨겨진 예술
미황사 주차장에 차를 대면 바로 일주문이다. 산문을 들어서면서 긴장감이 한풀 꺾인다. 문보다 지난해 내건 ‘달마산미황사’ 현판에 더 눈길이 간다. 한자에 절묘하게 그림을 입혔다. 특히 절집을 품은 ‘산(山)’ 자에는 불탑과 소나무, 꽃 가지에 스님(혹은 방문객)의 모습까지 들어 있다. 몸가짐을 조심하고 무조건 경건해야 할 것 같은 사찰의 위엄을 단숨에 허물어 뜨린다. 박방영 화가의 작품이다.
천천히 계단을 오른다. 길 양편은 검푸른 동백 숲이다. 절정을 지나고 드문드문 남은 동백꽃이 그래서 더 반갑다. 절간에 들어서면 왼편에 달마대사 석상이 세워져 있다. 훌떡 벗겨진 머리에 수염은 무성하고 장삼 자락이 바닥까지 늘어졌으니 도통한 신선의 풍모다. 달마대사는 남북조시대 승려로 중국 선종의 시조로 알려졌다. 다른 뜻도 있다. 사전에는 ‘달마’를 불교에서 자연계의 법칙과 인간의 질서를 이르는 말이라 정의해 놓았다. 선문답처럼 모호하다. 미황사 뒷산이 하필 달마산인 것도, 달마가 동쪽으로 온 까닭도 여전히 의문이다.
자하루 아래 통로를 지나면 드디어 대웅보전(보물 제947호)이 모습을 드러낸다. 미황사 대웅전은 단청을 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화장기 없고 화려한 치장이 없어 더욱 아름답다고 평가되는 건물이다. 미황사 대웅전이 처음부터 단청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건물 오른쪽 서까래를 유심히 살펴보면 색을 입혔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사적비에 따르면 미황사는 통일신라시대인 749년(경덕왕 8)에 처음 지었다. 정유재란으로 소실된 후 1598년(선조 31) 다시 지었고, 1754년(영조 30) 수리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단청을 한 것도 이때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장식 외에 건물을 보호하는 것도 단청의 중요한 기능이다. 미황사의 다른 전각은 해송을 주로 사용했지만, 대웅보전만은 보길도에서 느티나무를 운반해 와서 지었다. 속이 단단해 칠을 하지 않아도 뒤틀림이 덜하고 잘 썩지 않는 장점이 있다는 게 사찰 측의 설명이다.
눈에 띄는 화려한 장식이 없다 해서 대웅전 건물이 그저 수수한 것만은 아니다. 아름드리 기둥에는 270여년 자연스럽게 형성된 나뭇결이 그 어떤 예술품보다 정교한 작품으로 남았다. 오랜 세월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며 섬세하게 갈라진 무늬가 비단결보다 곱다. 보길도 느티나무가 그린 추상화다.
기둥을 떠받치고 있는 주춧돌에도 비밀이 숨어 있다. 보통 사찰의 조각에는 연꽃무늬가 많은데, 이곳 대웅전 주춧돌에는 연꽃을 기본으로 다양한 바다생물이 새겨져 있다. 굴비를 엮은 듯한 생선 두름, 모래톱을 헤치고 바다로 나아가는 듯한 아기 거북, 드넓은 갯벌에서 옆걸음 하는 듯한 꽃게 등을 보고 있노라면 해남의 바다 내음이 산중까지 그득 퍼진다. 이만하면 명품 주춧돌에 명작 기둥이다. 대웅전 바로 뒤편 응진당 앞마당에 서면 멀리 바다가 내려다보인다. 진도 방향으로 떨어지는 낙조가 특히 아름답다고 자랑한다.
미황사 창건 설화 역시 바다와 뗄 수 없다. 서역 우전왕국에서 경전과 불상을 가득 실은 배가 땅끝에 도착했다. 이때 검은 돌에서 깨어난 소가 경전을 싣고 가다 쓰러져 일어나지 못한 곳에 세운 사찰이 바로 미황사다. ‘미황(美黃)’은 바로 그 소의 아름다운 울음소리와, 함께 싣고 온 황금 불상을 의미한다. 미황사 아래 우분마을에는 당시 소의 무덤이 남아 있다고 한다.
미황사 큰스님들의 사리와 유골을 봉안한 부도탑에도 해학이 넘친다. 대웅전 주춧돌을 장식한 게와 물고기는 물론이고 도깨비와 바닷새까지 새겨져 있다. 다소 투박한 문고리 장식도 서민적이다. 죽음의 공간이라는 무거움보다 친근함이 앞서 괜히 한번 열어보고 싶은 장난기가 발동한다.
미황사 부도암까지는 대웅전에서 약 700m 산길을 거슬러 올라야 한다. 등산이라 할 수준은 아니고 차가 다닐 정도로 길이 잘 닦여 있어서 천천히 걷기 좋다. 길 양편으로 계절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짙푸른 상록활엽수가 가득하다. 키 큰 후박나무와 경쟁해야 하는 동백도 이곳에선 하늘 높이 가지를 뻗었다.
부도암에서 내려오는데 덩치 큰 개 한 마리가 어슬렁어슬렁 뒤따라온다. 혼자였으면 다소 무서웠을 법한데, 이런 속내를 눈치챘는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뒤를 돌아볼 때마다 못 본 척 슬쩍 눈길을 피한다. 길을 터주니 그제야 앞서 가는데, 홀로 내닫지 않고 또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보조를 맞춘다.
대웅전 앞마당에서 카메라를 들었더니, 바로 앞에서 은근슬쩍 자세를 잡는다. 웅장하면서도 아기자기한 달마산 바위 능선이 병풍처럼 사찰을 감싸고 있는데, 무념무상 성불한 견공이 평화롭게 절집을 지키고 있는 모습이다. 외모가 흡사 늑대와 비슷해 사찰에서는 달마산 울프, ‘달프’라 부르고 있다.
미황사는 마지막으로 수리를 한 지 266년 만인 올해 다시 대웅보전을 전면 해체ㆍ보수할 계획이다. 아직 구체적인 일정이 잡히지 않았지만 공사가 시작되면 가림막이 쳐질 것이다. 올해 안에 미황사를 가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산 끝ㆍ땅 끝ㆍ하늘 끝…구도자의 절 도솔암
미황사 뒤편 달마산은 땅끝의 금강산에 비유된다. 산 둘레에는 ‘천년숲 옛길’이, 능선으로는 ‘달마고도’ 등산로가 조성돼 있다. 능선 양편으로 바다와 숲, 넓은 들판이 시원하게 펼쳐져 풍광만큼은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 길이다. 외부 자재와 장비 없이 순전히 사람의 손으로 돌을 치우고, 계단을 쌓고, 배수로를 정비해 길 자체도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살렸다. 인공 구조물이 거의 없으니 높낮이에 비해 그만큼 험하기도 하다. 날카롭게 바위가 잘려 나간 부분도 있어 특히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달마고도 전 구간은 약 12km로 7시간가량 걸린다. 높이 489m 불썬봉을 중심으로 바위 능선이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다. 미황사에서 출발하면 약 9km로 종주하는 데 4시간가량 걸린다. 어디까지나 산을 좀 탄다는 사람 기준이다.
산행은 힘들고 달마고도의 풍광은 꼭 보고 싶으니 요령을 좀 피웠다. 달마고도 전 구간을 걷는 대신 미황사에서 부도암까지 왕복한 후 차량을 이용해 도솔암으로 이동했다.
도솔암은 달마산의 열두 암자 중 유일하게 복원한 기도 도량으로 통일신라시대 말 의상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유재란 때 불에 타 흔적만 남았던 곳에 2006년 복원했다. 암자는 크지 않지만 가파른 절벽에 축대를 쌓고, 1,800장의 기와를 이곳까지 나른 자체가 기도와 구도의 과정이었을 듯하다.
암자는 달마고도 남쪽 끝자락 부근에 위치한다. 차로 능선 부근까지 이동한 후 주차장에서 약 800m만 걸으면 된다. 가파른 구간은 없지만 뾰족한 바위가 곳곳에 흙 위로 드러나 있어 쉬운 길은 아니다.
오르락내리락 할 때마다 산줄기에서 흘러내린 기암괴석이 모습을 바꿔가며 감탄사를 자아낸다. 발 아래로 보리 싹이 푸릇푸릇한 초록 들판이 펼쳐지고, 그 너머로 푸른 바다와 다도해의 풍광이 그림처럼 이어진다. 이렇게 20분가량 걸어 도솔암에 닿으면 풍경은 정점을 찍는다. 수직으로 선 바위 사이에 층층이 돌을 쌓고 그 위에 작은 암자 하나가 걸려 있다. 가히 지상 위의 또 다른 세상이다.
도솔은 불교에서 미륵보살이 사는 곳이다. 세상의 중앙이라는 수미산에서도 한참을 더 가야 닿는 곳이다. 암자 뒤로는 달마산의 높고 낮은 산줄기가 이어지고, 정면으로는 멀리 서남해 바다가 아른거린다. 그 바다로 마침 노을이 지고 있었다. 태양이 수평선에 가까워지자 하늘과 바다가 붉게 물든다. 빛을 등진 바위 봉우리는 흑백의 경계가 허물어져 고운 노을과 대비된다. 도솔암 주변 바위는 붉은 기운을 한껏 흡수해 신비로움에 휩싸인다. 힘들게 암자를 찾은 여행객은 종교를 불문하고 절로 두 손을 모아 합장한다. 전국을 불안과 공포로 짓누르는 이 바이러스도 하루빨리 사라지길….
<해남=글ㆍ사진 최흥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