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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스시·냉면… 갈등도 녹이는‘혀 위의 외교’

지역뉴스 | 기획·특집 | 2018-05-08 09:09:34

정상회담,외교,만찬,오리,스시,냉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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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피타이저로 나온 아스파라거스 수프에 이어 생선구이와 비둘기 요리, 거위간 요리, 송로버섯을 곁들인 안심 요리와 양다리 구이까지 다섯 가지 메인 요리가 차례로 서빙된다. 

디저트는 치즈와 커피·코냑이다. 어느 미슐랭 레스토랑의 최고급 프랑스 코스 요리 메뉴가 아니다. 구한말인 1905년 대한제국 황제인 고종이 외교사절단을 위해 주최한 궁중만찬의 메뉴다. 격변하는 근대화의 흐름에서 독립적인 근대국가로서의 위상을 갖추고자 했던 고종은 외국 공사 등을 접견하는 연회에서 십수 가지 요리로 구성된 전통 프랑스식 코스 요리를 접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1972년 닉슨 방중 이끈 베이징덕

오바마와 서먹한 사이였던 아베는

함께 스시 즐기는 사진으로 큰 효과

트럼프 국빈 방한땐 독도새우 포함

남북정상회담선 통일각 냉면으로

민족 통일·평화 상징적 의미 담아

소프트파워 시대 경제력 과시보단

음식으로 문화적 매력 어필 주력

외교행사에서 만찬은 하나의 전략이다. 상대국 외교사절단에 어떤 인상적인 음식을 선보이느냐에 따라 딱딱한 양국관계가 더 쉽게 풀릴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경제력이나 군사력보다 문화적 매력을 중시하는 소프트파워의 시대를 맞아 외교자산으로서 음식이 갖는 의미는 점차 커지고 있다. 

미중관계 정상화를 위한 물밑 외교협상이 한창이던 1971년 7월, 중국을 찾은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에게 중국이 대접한 음식은 베이징 오리구이였다. 당시 키신저 장관과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는 중국의 전통 고급요리를 사이에 두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협상을 끌어갔다. 덕분에 양국 간의 갈등 기류는 누그러지고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의 중국 방문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전격 결정됐다. 

이후 중국은 1972년 방중한 닉슨 대통령을 위한 만찬으로 해산물을 좋아하는 닉슨의 취향에 맞춘 전복 요리와 함께 베이징 오리, 망태버섯탕을 내놓았다. 닉슨 대통령은 특히 망태버섯을 잘게 잘라 오랜 시간 푹 끓인 요리에 큰 만족감을 표시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정상회담 이후 양국 지도자 간에 신뢰와 우정이 싹트면서 양국의 정치·경제무역 관계 및 국민 간 왕래도 대폭 늘어났다. 

중국의 음식외교가 미국 최고권력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셈이다. 키신저 전 장관은 훗날 “베이징 오리구이를 먹고 중국의 요구를 다 들어줬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일본은 양국 정상 간의 친밀감을 강조하는 ‘스시 외교’로 유명하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과 서먹한 사이였던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2014년 4월 도쿄 긴자의 유명한 스시집인 ‘스키야바시 지로’에서 넥타이를 풀고 스시 카운터에 나란히 앉아 담소하는 사진 한 장으로 미일관계가 긴밀함을 홍보하는 효과를 충분히 거뒀다는 평가를 받았다.

만찬 음식은 대외적으로 비치는 정치적 상징성도 크다. 지난해 11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국빈 방한 당시 우리 정부가 국빈 만찬에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를 초대하고 ‘독도새우’를 메뉴에 포함하자 일본 정부는 강하게 반발했다. 

일본 정부와 언론들이 독도새우에 대한 불쾌감을 표시하며 한일관계에 미칠 영향까지 거론하고 나서는 등 외교문제로 비화시키면서 우리 측은 독도새우라는 이름과 함께 ‘다케시마’가 아닌 ‘독도’를 국제사회에 널리 알리는 외교적 성과를 거뒀다. 

일본은 27일 남북 정상회담에서 봄꽃으로 장식한 망고무스 위에 독도가 그려진 한반도기를 새긴 ‘독도 디저트’에 또다시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만찬에서 빼달라고 공식 항의했지만 우리 정부는 이를 일축했다. 전 세계가 주목하는 남북 정상회담에서 독도가 우리의 영토임을 다시 한번 천명하겠다는 외교적 계산 때문이다. 

하지만 남북 정상회담의 국빈만찬 메뉴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평양 옥류관 냉면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제안을 북측이 받아들여 메뉴에 포함된 옥류관 냉면은 한반도 통일과 평화의 염원이 담긴 음식이라는 상징성을 띤다. 만찬을 위해 북한은 옥류관 수석요리사를 행사 당일 판문점에 파견하고 옥류관 제면기를 판문점 통일각에 설치했다. 

‘통일각’에서 갓 뽑아낸 냉면은 만찬장인 ‘평화의집’으로 공수된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남북 정상회담 환영 만찬은 우리 민족의 ‘통일’과 ‘평화’를 위해 애쓰셨던 분들의 뜻을 담아 준비했다”고 의미를 설명했다.  

바늘 가는 데 실이 따라가듯, 음식에 빠지지 말아야 할 것은 요리와의 궁합이 가장 잘 맞고 만찬장의 격조를 한층 높여주는 ‘만찬주’다. 지난달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방중 만찬 때 등장한 중국 마오타이주는 단연 화제였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통상 국빈을 맞을 때 4,000위안(약 67만원)짜리 마오타이주(2015~2016년산)를 내놓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한동안 껄끄러웠던 북한과의 관계개선에 신호탄이 된 이 만찬에서는 2003년산으로 한 병에 무려 128만위안(약 2억1,657만원)짜리 초호화 마오타이주를 특별 접대했다. 조세영 동서대 일본연구센터 소장은 “김 위원장 입장에서는 닉슨과 할아버지 김일성이 방중했을 때 제공된 국빈주로 똑같은 접대를 받아 대외적 위상을 높였고 시 주석은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을 배려한 큰형다운 대국의 모습을 과시해 양쪽이 윈윈하는 만남이었다”고 설명했다.  

중국과 대만이 1949년 분단 이후 66년 만에 정상회담을 열었던 자리에서 가장 큰 역할은 했던 것도 만찬주였다. 2015년 11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마잉주 당시 대만 총통의 역사적 정상회담에 이어 열린 국빈만찬은 ‘고량주 만찬’으로 통한다. 당시 마 총통은 진먼 고량주와 황주인 마쭈라오주를, 시 주석은 마오타이를 준비해 서로 권했다. 대만이 준비한 두 술의 원산지는 양안 분단의 최전선인 대만해협에 있다. 마 총통은 “시 주석에게 두 술의 역사를 설명했고 시 주석이 진먼 수수를 대륙에 수입하는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현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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