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히브리어로 ‘쉐임’)이 주는 위력이 있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주는 위력은 <가장 큰 선물의 위력>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던 당시의 히브리인들은 성(姓, Last Name)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이름’을 부를 때, <구분의 목적>으로 <’어디’ 출신 ‘아무개’> 혹은 <’누구의 아들 ‘아무개’>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경우는 “나사렛 예수”로 불려졌습니다.
본문 사도행전 3장의 상황은 <한 사람>에게 그 무엇보다도 <상당한 기대감>으로 부풀어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 기대감에는 하나의 걸림돌이 있습니다. 그것은 <편견>입니다. 편견은 <냉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을 말합니다. 편견이 생기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이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인간의 불완전한 인식>때문입니다. 이때문에 빚어지는 <일반화의 오류>가 편견의 걸림돌입니다. 이것으로 인해 <왜곡된 생각>이 발생하고 그 결과는 <사회의 악영향>이라는 모순의 포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찾아오신 당시나,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의 초대교회 당시나, 지금 21세기의 <포스터 모더니즘의 시대>인 오늘의 현실이나, 동일하게,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편견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갈릴리 나사렛은 성서에서 로마의 황제와 직접적으로 결부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는 <나사렛 출신>으로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잉태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베들레헴에서 출산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출생하셨던 당시의 로마 황제는 <아우그스투스, 아구스도, Augustus>입니다(눅 2:1). 이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에 따라 <호구조사, Census>를 하기 위해 예수님의 선조, <다윗 왕의 고향 베들레헴>에 도착하였을 때, 여관에는 빈 방이 없어 부득불, <베들레헴 여관의 마구간>에서 탄생하게 되셨습니다. 이 초라한 탄생부터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는 <편견의 영향권> 아래 계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이스라엘의 임금 헤롯은 자신의 권력을 빼앗길까봐 메시아 예수의 탄생을 가장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예언서에서 메시아가 탄생할 장소로 기록된 <베들레헴의 장자>를 모조리 죽이는 <만행>을 저지릅니다(마 2:26). 이 살육을 피해<예수님의 가족>은 이집트에서 살다가 <헤롯>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옵니다. 그 당시, <나사렛>을 포함한 <갈릴리 지방>은 당시 교통의 요충지이고 풍요로운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제국의 수탈이 심하여 <가난한 지역>이 되고 말았습니다. 반면,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남쪽 유대 사람들은 종교적 특성과 자부심이 교만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은 <편견>에 사로잡혀서 <나사렛 지역>을 무시했습니다. 이 무시의 대명사가 <나사렛>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전 미문(The gate, “Beautiful”)을 찾아온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에게 <베드로와 요한>이 준 <가장 큰 선물>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증거로, <금이나 은과 같은 물질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에 구걸하던 거지에게 베드로는 그에게 가장 간절한 장애의 극복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해결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3:6). “이에 뛰어 서서 걸으며,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라.”(행3:8)
편견을 극복할 수 있는 최고의 이름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지금도 편견에 사로잡힌 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왜곡된 확신에 사로잡힌 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여전히 <모순의 뫼비우스 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어나 걸으며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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