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시애틀에서 살았을 때 등산 갔다가 낭패한 적이 있다. 당시엔 주말등산이 일상이어서 장비 꾸리기에 이골이 났었는데 그날은 웬일인지 가장 중요한 등산화를 빼놓고 갔다. 발목까지 빠지는 진흙길을 운동화를 신고 오르느라 애먹었다. 지난달엔 아내의 검진 예약시간에 맞춰 병원에 가려고 나섰다가 자동차 시동이 걸리지 않아 진땀을 뺐다. 결국 옆집 친구가 데려다줬다.
예상할 수 있든 없든, 눈앞의 일이든 먼 훗날 일이든, 유비무환의 마음 자세가 중요하다. 팔순 나이에도 팔팔한 내 친구 하나는 환갑이 까마득했던 30여년 전 부부묘지를 천주교 묘지공원에 장만했다. 그 땐 참 한가로운 사람이라며 비아냥했는데 지금은 그가 부럽기 짝이 없다. 죽음 준비는 등산화 준비와는 비교도 안 되게 중요함을 심각하게 절감하는 나이가 됐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건 죽음과 세금”이라는 조크가 있다. 더 지독한 놈이 있다. 최근 한 신문에서 “비싼 물가는 죽은 몸에도 달라붙는다”라는 기사를 읽었다. 묘지구입은 물론 매장과 화장을 비롯한 다양한 방식의 시신처리, 관 값, 영결식, 운구, 꽃 장식, 문상객 접대 등 장례식 비용이 일괄적으로 크게 올라 상을 당해 슬픔에 잠긴 유가족에게 한숨을 더해준다는 내용이다.
장례비용은 유가족이 선택하는 장례식 규모나 옵션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미국의 전국장례업자협회(NFDA)가 집계한 올해 전국의 평균 장례비용은 1만1,420달러이다. 이는 장의사가 부과하는 기본금액으로 관 값이 2,500달러(전체의 22%), 예식요금 2,300달러(20%), 시설 사용료(뷰잉 등) 965달러(9%), 엔바밍(시신 방부처리) 775달러(7%), 시신운구 350달러(3%) 등이 포함된다.
그 밖에 장의사 외부의 서비스를 선택하면 비용이 최고 2,300달러까지 추가될 수 있다. 문상객 접대 음식비 500달러, 연주자 수고비 500달러, 신문 부고게재 500달러, 목사(신부) 사례비 400달러, 꽃 장식 300달러, 사망 증명서 발급 100달러 등이다(한인 장의사는 다를 수 있다). 장의사 기본금액과 합치면 총 1만3,720달러다. 물론 묘지 구입비와 화장 등 시신처리 비용은 별도다.
NFDA 집계에 따르면 2021~2023년 화장 장례비용은 평균 8%, 매장 장례비용은 6% 올랐다. 인건비가 주도했다. NFDA 관계자는 장의사를 병원 응급실이나 앰뷸런스 업체에 비유했다. 가정집, 양로원, 병원, 사고현장 등에서 무시로 시신을 옮겨와 처리하려면 직원들이 주 7일, 하루 24시간 대기해야 하므로 인건비가 많이 들 수밖에 없단다. 관 값도 금속이든 목재든 크게 올랐다.
한국과 달리 미국엔 매장과 화장 외에 친환경 대안들이 뜨고 있다. ‘퇴비장(composting)’과 ‘물 화장(aquamation)’이다. 시신을 미생물로 썩혀 흙으로 만드는 게 퇴비장이고 알칼리 물로 살을 분해시켜 거름으로 만드는 게 물 화장이다(퇴비장은 캘리포니아에서 2027년부터 합법화됨). 남은 뼈는 화장처럼 분쇄해 처리한다. 물론 양쪽 모두 비용이 매장이나 화장보다 훨씬 비싸다.
내 친구는 묘지를 미리 구입했지만 ‘장례보험’에도 미리 들어두면 자녀들 부담을 더 덜어줄 수 있다. 대개 5,000달러부터 2만5,000달러까지다. 건강검진도 필요 없다. 1만달러짜리에 가입하면 보험료가 50세는 월 25~30달러지만 80세는 150~190달러다. 보험가입 후 2년 안에 죽으면 그동안 납부한 보험료만 환급받는다. ‘인생 100세 시대’여서인지 장례보험은 별로 인기가 없다.
하지만 장례비가 죽음 준비의 전부는 아니다. 진짜 좋은 죽음은 돈으로 준비 못한다. 한국에선 65세 이상 노인 중 77%가 병원이나 요양원 등에서 쓸쓸이 죽는다. 숨만 붙여두는 연명치료를 받으며 오래 고생하다 숨지는 노인도 많다. 집에서 사랑하는 가족에 둘러싸여 편안히 눈을 감는 좋은 죽음은 좋은 건강을 끝까지 유지해야만 가능하다. 그것이 맘대로 안 된다는 게 문제다.
<윤여춘 전 시애틀지사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