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미 해군은 일단의 정보장교들을 일본에 파견했다. 3년 동안 현지에서 일본어 교육을 받게 한 것이다. 훗날 이 언어연수 현지파견은 상당히 선견지명이 있는 조치로 평가됐다.
이 때 교육을 받은 2명의 정보장교가 2차 대전의 주요 고비 때 결정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본 제국의 군사암호를 부분적으로 해독하는 데 성공, 체스터 니미츠 미 태평양해군사령관에게 일본제국 해군의 미드웨이 섬 공격이 임박했음을 사전에 경고했다.
그 때가 1942년 6월로 그 결과 미 해군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승리, 태평양전쟁의 전세를 결정적으로 미국에 유리하게 뒤집었다.
이 에피소드가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특정 국가와의 경쟁에서 그 나라의 언어를 습득하는 것은 기본 필수 사항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한 언어를 숙달하는 데 있어 왕도는 그 언어가 사용되는 현지에서 교육을 받는 것이다.
현지 언어연수교육은 단순히 언어숙달로만 끝나지 않는다. 문화, 사고방식 등 전체적으로 그 나라를 깊이 이해하는 능력도 배양시킨다.
경쟁국을 제대로 알기위해서는 그 나라 언어 숙달은 필수다. 이에 따라 1929년 무렵 자국의 요원들을 경쟁국에 연수를 보낸 나라는 사실 미국만이 아니었다.
훗날 2차 세계 대전 때 일본제국 해군 연합함대 사령장관으로 진주만기습의 주인공이 된 야마모토 이소로쿠도 1929년 워싱턴주재 일본대사관에 파견돼 하버드대학에서 연수를 받았다.
야마모토는 미국체류를 통해 한 가지를 체감했다. 막강한 미국의 산업능력 때문에 미국과의 장기전은 결코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유일한 희망은 기습적으로 케이오 펀치를 날리는 데 있는 것으로 보았다.
야마모토의 진주만기습은 바로 이런 판단에 따른 작품이다. 그 진주만기습을 일부 역사가들은 전술적으로는 성공이지만 전략적으로는 대실착으로 평가한다.
오늘 날의 평가는 다르다. 야마모토의 생각대로 진주만기습은 일본으로서는 유일한 희망이었다는 데 다수의 역사가들은 동의한다.
1941년 12월 7일 기습 시 마침 미 해군의 주력 항공모함들이 진주만에 정박해 있지 않아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야마모토의 계획은 성공했었을 것이라는 평가다.
미 해군이 파괴된 항모를 수리, 대체하는 등 전단을 새로 꾸리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려 그 사이 일본은 호주, 미드웨이, 심지어 하와이와 알래스카 일부까지 점령하는 데 성공했을 가능성이 컸다는 지적이다.
‘제 2의 냉전’, ‘자유 민주주의세력 대 권위주의 독재세력의 대결’- 하루가 멀다고 미 언론을 장식하고 있는 말들이다. 이는 다름이 아니다. 이 양대 대립세력의 중심축은 미국과 중국으로 두 나라는 무한경쟁시대에 돌입했다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미국은 경쟁자, 중국의 언어를 숙달하는 인력을 키워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을까.
이코노미스트지에 따르면 중국 현지에서 중국어를 배우고 있는 미국 학생은 800여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코비드 팬데믹 때 500여명에 비교하면 다소 는 셈. 그러나 2011~12 학사연도 때 15,000여명에 비하면 크게 준 숫자다. 반면 미국에 유학 중인 중국 학생은 30만이 넘는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로움이 없다’(知彼知己 百戰不殆) - 손자병법 3장 모공(謀攻)편의 결구다.
이 가르침을 미국은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어쩐지 개운치 않은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