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노천명, ‘사슴’), 사슴들이 모가지를 잔뜩 움츠려야 했던 사건이 있었다. 남가주의 인기 휴양지 카탈리나 섬의 사슴들이 집단 떼죽음을 당할 위기를 간신히 모면했다. 그렇다고 떼죽음의 위험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세인트 카탈리나 아일랜드가 공식 지명인 카탈리나 섬은 LA 근교의 대표적 관광지 중 하나이다. 롱비치 선착장에서 한시간 정도 배를 타고 가면 태평양 한가운데 조용하고 매혹적인 섬이 모습을 드러낸다. 바닥이 보이도록 맑은 바닷물, 숨 막히게 아름다운 석양, 쏟아져 내릴 듯 하늘 가득한 별들, 거기에 어디를 가나 마주치는 야생 사슴 등.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천혜의 휴양지이다.
그런데 평소 평화로운 이 섬이 지난 몇달 몹시 시끄러웠다. 문제의 주인공은 사슴. 섬의 고유한 생태계 보존을 위해 사슴을 모두 죽여야 한다는 섬 보존위원회 측과 “사슴은 섬의 문화와 역사의 일부”라는 주민들이 격렬하게 대치했다.
카탈리나 섬에 서식하는 사슴은 노새사슴(mule deer)이다. 귀가 노새의 귀처럼 커서 붙여진 이름이다. 북아메리카 서부에 서식하는 종으로 천적은 퓨마, 늑대, 곰. 이들 천적이 카탈리나 섬에는 없다는 것이 문제의 발단이다. 천적이 없어 개체 수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난 이들이 섬 고유의 희귀종 식물들을 마구 먹어치우면서 생태계 교란을 초래하고 있다.
카탈리나 섬의 88%를 소유한 비영리단체, 카탈리나 섬 보존위원회는 사슴을 없애는 것만이 섬을 살리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사슴들로 인해 섬 고유 식물들이 사라지고 외래종이 퍼지면서 산불위험까지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섬의 생태계를 보존하고 안전하게 후손들에게 물려주려면 사슴을 모두 죽이는 수밖에 없다고 보존위원회는 주장한다.
4,000여 주민들 중 상당수는 사슴을 죽여야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불편한데 더 더욱 이들을 격분하게 한 것은 사슴을 죽이는 방법. 보존위원회는 저격수들을 헬리콥터에 태우고 섬을 돌며 AR-15 스타일 공격용 라이플로 2,000마리 정도 되는 사슴들을 일일이 쏘아 죽이는 플랜을 세우고 지난 가을 관계 당국에 승인을 요청했다.
주민들은 너무도 비인도적이라며 즉각 반대 청원 운동을 전개했다. 공중에서 총탄이 비 오듯 쏟아지는 광경이며 도처에 사슴 시체들이 널려있을 광경을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는 것이다.
카탈리아 섬 사슴 살리기 연맹 등 주민단체들은 섬 주민뿐 아니라 동물보호단체들의 호응을 얻어 수만명의 서명을 받아 LA카운티 수퍼바이저 위원회에 제출했다. 위원회는 지난 4월 만장일치로 사슴 공중 사살 반대 결정을 내리고 가주 어류 및 야생국에 관련안 승인을 거부해달라는 서한을 보냈다.
결국 지난 주 카탈리나 섬 보존위원회는 한발 뒤로 물러났다. 헬리콥터 동원 사슴 사살안을 백지화하고 다른 방안을 모색해보겠다고 했다. 하지만 가파른 협곡 구석구석에 서식하는 사슴들을 모두 포획해 섬 밖으로 내보낼 수도 없고, 담장을 쳐서 가둘 수도 없으니 공중사살이 최선이라는 입장은 바꾸지 않고 있다.
사슴들은 억울하다. 사슴들이 제 발로 섬에 온 게 아니었다. 섬 당국이 사냥관광 육성을 위해 100년 전 사슴 18마리를 들여와 섬에 풀어놓은 것이 시작이었다. 그 즈음 들소, 돼지, 염소도 들여왔는데, 이후 숫자가 많아지자 돼지와 염소는 모두 없앴고, 들소는 불임 시켜 숫자를 줄였다. 이제 사슴 차례이다. 누가 이 모두를 초래했는가. 생태계 교란과 환경파괴의 주범은 인간이라는 사실이 여기서도 예외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