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애틀랜타
첫광고
김성희 부동산
이규 레스토랑

[주말 에세이] 헬렌을 위한 기도

지역뉴스 | 외부 칼럼 | 2024-05-17 18:57:06

주말에세이, 송윤정,금융전문가,헬렌을 위한 기도

구양숙 부동산표정원 융자미국 크래딧 교정

한국에서 돌아오니 마당 곳곳에 심어진 화초들 사이로 불쑥불쑥 솟아 나온 풀이 있었다. 풀만 봐서는 냉이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분명 한국에서 식용이나 약재로 쓸만하게 생겼다. 농장을 하시는 한 시인께 사진을 찍어 보내 이름을 물었다. “아래 풀은 냉이잎 비슷하게 생겼고 대가 길게 올라온 끝엔 노란 작은 꽃들이 펴요. 잎을 조금 먹어 보니 쓴맛이 나고요.” 조금 있다 문자가 왔다. “고들빼기 같은데요.” 검색해 보니, ‘고들빼기, 벌씀바귀, 뽀리뱅이 구분하기’ 혹은 ‘냉이, 지칭개, 뽀리뱅이 구별법’ 등 친절하게도 각 부위 사진에 상세한 설명까지 더해 구분하는 법과 각 풀의 식용법, 효능 등 유용한 정보를 담은 글이 많이 있다. 

아프리카 속담에 ‘노인 한 명이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 했는데, 인터넷과 친절한 사람들 덕에 그 속담은 더 이상 적합하지 않은 때가 오지 않을까 싶다. 자신의 경험과 정보를 나누는 이런 세상이 얼마나 고마운지. 지식과 경험을 축적하는 것 외에도 유익한 기록을 남기기 위해선 자신의 귀한 시간을 들여야 한다. 기록에 생각이 미치니, 헬렌 맥큔Helen McCune 할머니가 떠올랐다. 한국에 다녀온 후에 집으로 초대해 그분의 얘기를 더 듣겠노라 약속했었다. 

헬렌은 내가 속한 가든 클럽의 엘리자베스 할머니를 통해 알게 된 분이다. 내가 한인문인회를 이끌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된 엘리자베스는 내게 꼭 소개해 주고 싶은 자기 친구가 있다며 헬렌 집으로 초대했다. “헬렌은 1934년에 평양에서 태어나서 여섯 살까지 그곳에서 살았어요. 헬렌의 얘길 들으면 책을 한 권 쓸 수 있을 거예요.” 엘리자베스는 헬렌에게서 받은 문자를 내게 보여주며 물었다. “일 테노레Il Tenore라는 뮤지컬 들어봤어요? 헬렌의 할머니 얘기가 서울에서 뮤지컬로 만들어져 공연 중이라 그러던데.”

올해 90세가 되어 밖에서 만나기보단 자신의 집에서 만나길 원한다는 헬렌 집으로 찾아갔다. 마침 그날이 정월 대보름날이라 한국 전통도 알릴 겸 나물과 오곡밥을 지어 비빔밥 점심을 준비해 갔다. 그 분께 수고가 되지 않도록 그릇과 수저까지 다 챙겨갔는데, 도착해보니 그분은 다이닝테이블에 손수 만들었다는 냅킨과 매트에 만찬 세트를 차려놓을 만큼 섬세한 분이었다. 거실에는 커다란 병풍과 한국의 전통 방석이 의자 위에 놓여있고 테이블 위엔 로버트 김Robert Kim이 쓴 ‘프로젝트 이글Project Eagle’과 ‘미국계 평양인 American Pyongyang’ 책이 놓여있었다. 

  “색동저고리를 입은 금발 소녀가 제 어릴 때예요.” ‘미국계 평양인’ 책 뒤표지의 금발 곱슬머리 여자아이 사진을 가리키며 헬렌이 말했다. “할아버지가 평양에 선교사로 가셔서 아빠도 평양에서 나고 나도 평양에서 태어났답니다. 엄마도 할아버지 때부터 한국에 선교사로 나가 한국에서 태어나셨죠. 두 분은 서로 모르고 지내다 미국 버클리 대학에 공부하러 와서 만나 결혼하고 다시 평양으로 가서 사셨죠. 1940년에 일본이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의 적국이 된 후 온 가족이 탈출해 왔어요. 미국에 오시자마자 아빠는 대통령에게 아시아태평양과 한국 관련 자문을 하는 역할을 맡으셨고, 한국전쟁이 났을 땐 엄마가 맥아더 장군의 통역을 맡으셨죠.”

점심을 먹으며 거의 세 시간에 걸쳐 들려준 헬렌의 이야기는 놀라울 따름이었다. 같은 민족으로 역사를 공유하는 북한 땅과 그곳에서의 삶을 백발이 된 미국 백인 할머니에게 듣는 진귀한 경험이었다. 문인회의 더 많은 분들과 이 숨겨진 보물 같은 이야기들을 듣고자 5월에 다시 만나자고 약속하며 헤어졌다. 헬렌에게 다시 만날 날짜를 잡기 위해 문자를 보내니, 즉각 답이 왔다. “한국에 잘 다녀와서 연락해 주니 고맙네. 근데 내가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고 방문객도 허용이 안 돼. 상황이 좀 나아지면 알려줄게.” 가슴이 철렁했다. 매일 그녀가 속히 회복되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기도하는데, 두 주가 더 지났는데도 아직 연락이 없다. 

   내 마당의 풀은 뽀리뱅이로 밝혀졌다. 풀도 정성스런 기록을 통해 제 이름을 찾듯, 헬렌과 그녀처럼 한국의 옛 모습을 간직한 이들의 기억이 잘 기록되어 후세에 전해지길 바라 마지않는다.

<송윤정 금융전문가>

 

댓글 0

의견쓰기::상업광고,인신공격,비방,욕설,음담패설등의 코멘트는 예고없이 삭제될수 있습니다. (0/100자를 넘길 수 없습니다.)

[박영권의 CPA코너] 나의 소득은 세금 보고 대상인가?
[박영권의 CPA코너] 나의 소득은 세금 보고 대상인가?

박영권 공인회계사 CPA, MBA 많은 납세자들은 “세금을 낼 만큼 벌지 않았는데도 신고를 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자주 갖는다. IRS는 소득세 신고 여부를 결정할 때 소득 규모

[법률칼럼] 결혼 영주권,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다

케빈 김 법무사  결혼 영주권 심사가 전례 없이 강화되고 있다. 과거에는 “결혼만 하면 된다”는 말이 공공연히 오갈 정도로 비교적 안정적인 이민 경로로 인식되었지만, 이제 그 공식

[칼럼] "삭제 키 없는 기록, 한국일보의 윤전기는 멈추지 않습니다"
[칼럼] "삭제 키 없는 기록, 한국일보의 윤전기는 멈추지 않습니다"

[행복한 아침] 아직도 새해다

김 정자(시인 수필가)                                           새 달력으로 바뀐 지 딱 열흘째다. 달력에는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이 태엽처럼 감겨

[내 마음의 시] 감사 여정
[내 마음의 시] 감사 여정

지천(支泉) 권명오 (수필가 / 칼럼니스트) 12월 31일 한해가 가고 있는 순간 순간추억이 떠 오른다겁도 없이 퍼 마시고기고만장 고성방가노래하고 춤추며 개똥 철학 읊어 댄수 많은

[신앙칼럼] 알파와 오메가(The Alpha And The Omega, 요한계시록Revelation 22:13)

방유창 목사 혜존(몽고메리 사랑 한인교회)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요한계시록 22:13). 뉴욕의 ‘타임스 스퀘어(Times Square)’에서

[한방 건강 칼럼] 말초신경병증의 한방치료
[한방 건강 칼럼] 말초신경병증의 한방치료

Q:  항암 치료 중입니다.  얼마전 부터 손가락의 심한 통증으로 일을 좀 많이 한 날에는 주먹을 쥘 수 없고 손가락들을 굽히는 것도 힘든 경우가 많습니다. 한방으로 치료할 수 있

[삶이 머무는 뜰] 헤픈 마음들이 빚어가는 아름다운 세상

조연혜 어떤 말들은 빛을 발하는 순간이 따로 있다. 함부로 낭비한다는 뜻의 ‘헤프다’도 그렇다. 저무는 해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며 이 단어가 꼭 있어야 할 자리는 ‘마음’ 곁일지

[삶과 생각] 2026년 새해
[삶과 생각] 2026년 새해

지천(支泉) 권명오 (수필가 / 칼럼니스트) 사람들은 누구나 하늘나라가 어떤 곳인지 천당, 지옥, 극락, 연옥이 어떻게 생겼는지 자세히 알거나 직접 보고 겪은 사람이 없다. 각자의

[추억의 아름다운 시] 서시

윤동주 시인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걸어가야겠다.

이상무가 간다 yotube 채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