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대학 졸업 후 들어간 잡지사에서 2년인가 3년차 기자 때 사진부 여기자와 함께 거제도로 출장을 간 일이 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있는 한국에서 등대는 바다를 항해하는 선박들의 길라잡이 역할을 한다. 한국의 경우 1903년 6월1일 최초로 인천 팔미도 등대가 불을 밝혔고 2년 후인 1905년 두 번째로 거문도 등대가 생겼다. 바로 이 거문도 등대를 취재하러 갔다.
거문도는 전남 여수시 삼산면에 속한 섬으로 등대는 여수 해양수산청 소속이었다. 5월 어느 날, 새벽같이 서울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여수로 가서 항만청 소속 직원을 만났고 여수 여객선 터미널에서 배를 타고 거제도에 갔다. 해가 있는 동안에 취재와 사진 촬영을 다 끝내고 그날로 여수로 돌아와 항만청에서 소개받은 은퇴한 등대지기 집에서 숙박하기로 했기에 아침부터 강행군했다.
두 시간 이상 배를 타고 가서 도착한 섬에서 등대지기를 만났다. 20대 후반쯤 되는, 얼굴이 까맣게 탄 등대지기는 성실하고 소박해 보였다. 섬은 바람이 좀 불었고 나무와 풀, 들꽃들이 바람에 누웠다 일어났다를 반복했다. 외딴 섬에 방목되는 흑염소들이 신기했는데 높은 바위산을 아주 잘 탔다.
원통형 백색 콘크리트 건물인 구등탑은 6.4미터 정도, 높았다. 최하단부의 등탑 건물 안의 계단을 올라서 불을 밝히는 등롱까지 올라갔다. 꼭대기 층에 자리한 렌즈가 얼마나 큰지 마치 세숫대야만 했다. 햇볕을 받아 낮에도 눈이 부셔 바로 보기 힘들 정도였다.
등대지기는 취재와 촬영이 끝나는 동안 한시도 자리를 뜨지 않고 도와주었다. 취재가 끝나자 저녁 먹고 배를 타라고 간곡히 권하길래 두 여기자가 쭈빗거리며 숙소 안으로 들어갔다. 어둡고 작은 방 아랫목에 차려진 동그란 밥상 위에 고봉으로 담겨진 밥과 된장찌개, 산나물 반찬이 있었다.
편하게 먹으라고 우리만 남겨두었는데 이 밥을 누가 했을까 궁금했다. 당시만 해도 육지와 연결되지 않은 이 섬은 한번 들어오면 몇 개월을 나가지 못하니 고기나 생선은 구경도 못했을 것이다. 두어 달에 한 번 들어오는 보급선이 폭풍이나 바람이 강하게 불면 해안에 접경 못할 테니 쌀이 떨어지는 날도 있었을 것이다.
밥을 거의 다 먹었는데 부엌 쪽으로 난 문으로 슝늉이 들어왔다. 등대지기의 아내가 아궁이 앞에서 불을 때고 있었다. 근처 산과 들판에서 나뭇가지를 끌어 모아 가마솥 밥을 해주었고 방이 좁으니 부엌에 내내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야 보았다. 윗목에 이불을 덮은 뭔가가 있었다. 태어난 지 3일 된 아기였다. 등대지기 아내는 출산 3일 만에 일어나 서울에서 온 손님들을 위해 나무를 때어 밥을 하고 국을 끊인 것이다.
좀 놀라긴 했지만, 20대 중반으로 미혼인 우리들은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짐작조차 못했다. 지금이라면 밥을 먹지 말고 왔어야 했다. 그래야 막 출산한 산모가 쉴 수 있을 텐데 그때는 왜 그것이 당연한 대접이라고 여겼을까.
등대지기는 절대로 낭만적인 직업이 아니다. 잠시도 긴장을 놓쳐서는 안 되는 극한 직업이다. 40년 전이니 낙후된 장비에 수동식이었을 것이다. 일출 직전에 소등하고 일몰에 직접 불을 켜야 하고 불빛이 맑아야 빛이 멀리 나가니 매번 등탑을 청소해야 했을 것이다.
그 다음 달 잡지의 앞면에 컬러 6페이지 정도의 등대를 중심으로 한 대자연의 풍경을 다룬 화보 기사가 났다. 그때 내가 쓴 기사를 읽을 길이 없지만 혹여나 등대지기의 삶에 낭만이란 단어 한 자라도 들어가지 않았기를 빈다. 그 몇 년 후 미국으로 와서 신문사에서 35년 세월을 보내며 기자로서 당당하게 살아왔다고 하지만 누군가에게 섭섭하고 건방지고 오만했을 것이다.
그 밥 한끼만 해도 그렇다. 그들의 며칠 식량을 두 여기자가 한 끼로 다 먹었을 수도 있었다. 거문도 등대 기사가 실린 잡지 한 권은 보내줬을까? 기억이 안 난다. 우리는 때로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절대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잊고 산다. 지금이라도 느끼게 되어 다행이다. 앞으로는 상대방이 내게 베푼 배려를 하나씩 갚으면서 살아야겠다. <민병임 뉴욕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