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만해도 인간세상은 믿는 세상이었다. 도리를 알고 실행하던 삶을 중요시하였던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같은 세상에서 이게 무슨 소리인지 잘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그때 세상은 나는 그러저러 변변치 못해도 세상은 어렵고 무서워 함부로 내 마음대로 못했었다. 한 집안을 보아도 어른은 자기 식구들에게 인간도리를 강조하며 남에게 항상 선의를 갖고 살아야 하는 것이 가훈이었다. 세상 사람의 도리의 뿌리는 언제 누구로부터 배웠는지 더 깊게 생각하게 하는 실제 있었던 일을 소개한다.
1912년 4월15일 타이타닉호가 빙하에 부딪쳐 배에 타고있던 사람 1,514명이 사망했고 710명이 구조되었던 큰 사고는 세상 사람들을 너무 놀라게 한 뉴스였고 연로한 사람들은 지금도 그 사건을 생생히 기억한다. 이 사건의 실제상황을 당시 생존자인 부선장이 오랜 침묵 끝에 드디어 당시의 이야기를 공개했다.
사고 당시 38세였던 타이타닉호의 이등 항해사 찰스 래이틀러는 선원 중 유일하게 구조된 승무원이었다. 그가 타이타닉호 참사의 자세한 사정을 담은 회고록을 내었다. 여기에 회고록 첫부분만 적어본다.
“선장이 침몰을 앞두고 여성과 아이를 먼저 구조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많은 여성승객들이 가족과의 이별 대신 남아있기를 선택했습니다. 저는 높은 소리로 “여성과 아이들은 이리 오세요!”라고 불렀지만, 가족을 버리고 혼자 구명보트에 오르려는 여성과 아이는 몇 명 없었습니다. 첫 구명보트가 바다로 내려가고, 저는 갑판 위에 있던 한 여성에게 말했습니다. “부인, 어서 구명보트에 오르세요!” 그녀는 뜻밖에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아니요, 저는 배에 남겠어요.” 이 말을 들은 여성의 남편이 “그러지 말고 어서 타세요! 여보!”라고 말하자, 여성은 “혼자 가지 않겠어요. 당신과 함께 이 배에 남을 거에요.” 그것이 제가 본 그 부부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당시 세계 최고 부자였던 애스터 IV는 임신 5개월 된 아내를 구명보트에 태워보내며 갑판위에 앉아 한 손에는 강아지를 안고 다른 한 손에는 시가 한 대를 피우면서 멀리 가는 보트를 향해 외쳤습니다. “아이러브 유!” 승객들을 대피시키던 선원 한명이 애스터에게 보트에 타라고 하자 애스터는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사람이 최소한의 양심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나서 마지막으로 남은 한 자리를 곁에 있던 한 아일랜드 여성에게 양보했습니다. 그는 타이타닉호 10대도 만들 수 있는 자산을 가진 부호였지만, 살아남을 수 있는 모든 기회를 거절했습니다. 자신의 목숨으로 양심을 지킨 위대한 사나이의 유일한 선택이었습니다.
성공한 은행가였던 구겐하임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순간에 아내에게 전해준 쪽지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 배에는 나의 이기심으로 구조 받지 못하고 죽어간 여성은 없을 것이오. 나는 금수만도 못한 삶을 살 바에야 신사답게 죽을 것이오.”
메이시스 백화점 창업자 슈트라우스는 세계 두번째 부자였습니다. 그가 어떤 말로 설득해도 아내 로잘리를 구명보트에 태우지 못했습니다. 아내 로잘리는 나는 “당신이 가는 곳에 항상 함께 갔어요. 세상 어디든지 당신과 함께 갈 거예요” 라며 남편을 두고 배에 오르는 것을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실로 인간세상은 이런 곳, 삶 자체가 고귀한 것. 비단 인간세상만 그러한 곳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소견이 좁아서다.
우리나라에서는 폐병에 걸리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시절, 아들이 젊은 나이에 걸려 아버지가 살려 보려 별수단을 다 써보다 결국 살 희망 안보이자 아버지는 사약을 마신다. 자식을 앞세울 수 없었다고. 그래서 그집에 아버지 상여가 먼저 나가는 것 동네사람들이 보고 안타까워했던 그 시절이나 타이타닉호 그 시절 얼마 전이다. 원래 세상은 그런 곳이었다.
<박치우 남성복식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