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오월을 보면 휴머니즘 달이란 생각이 든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한국에는 노동절이 있고 그리고 부처님오신 날이 있다.
생일은 모두에게 있고, 해마다 한번 오지만 부처님 생일을 맞이하는 마음은 늘 새롭다. 선지식은 ‘매일 매일이 새 날’(日日新)이어야한다는 것도 모자라 ‘새 날을 또 새 날로’(又日新)라고 했듯이 하루가 아닌 365번 지난날이 새롭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하지만 해마다 달라지는 연등 퍼레이드만 보아도 작년과 올해는 다르지 않은가. 그래서 불교에서는 항상 변하는 ‘무상을 보라’고 강조하는가보다.
무상과 무아. 그 둘은 끝없이 여러가지를 떠오르게 하는데 아무리 양보해도 행복이나 즐거움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해피 버스데이 투 유”하고 즐겁게 노래하듯 태어남은 축복이요, 축하하는 날이다. 그러나 냉정한 부처님께서는 늙고 병들고 죽는 것만 괴로운 게 아니라 태어남이 괴로움이라 하셨다. 태어남이 없었다면 늙고 병들고 죽는 일도 없기에.
석가 부처님은 출가 전 당신의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라훌라, 라훌라”하셨다. 라훌라는 구속, 장애라는 뜻으로 아이가 태어나니 ‘아빠’라는 굴레가 생긴 것을 말한 것인데 그 혼잣말이 그만 아들의 이름이 되었으니, 라훌라라 불린 아들이나 그 아버지는 그 이름이 들리면 속이 편했을까.
그렇듯 불교에서 태어남이란 즐거운 것만이 아닐 터인데 부처님 태어나신 날이라 하여 웃고 떠들며 즐기기만 한다면 과연 그것이 불교의 의미를 제대로 새기며 보내는 것인지…. ‘아모르파티’의 본 뜻은 영원회귀라 하여 불교의 윤회와는 형제 같은 뜻이라 할 수 있는데, 노래가사는 오늘을 즐기는 파티로 새기듯 다가오는 초파일을 어떻게 보내야하는지 답을 보는 것 같다.
조계종에서 준비한 연등 퍼레이드를 보면 그 화려함에 입이 절로 벌어져 웃음 속에 합장한다. 만일 조금 더 여유가 있으면 불꽃놀이 하듯 밤하늘에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시는 모습을 드론으로 연출하여 사람들을 더욱 즐겁게 해줄 수도 있으리라.
그런데 그런 즐거움은 얼마나 지속되나. 십 분, 한 시간도 가지 못하고 끊어지는 기쁨일 뿐이다. 항상 하지 못한다. 석가모니께서는 보리수 아래에서 부처를 이루었는데 부처의 뜻은 여래라 하여 오고 감이 없다는 것이다. 성철 큰 스님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방편으로 열반을 나타내지만 내가 실제 죽는 것 아니고 항상 여기서 법을 설하네.”라고 하셨다.
오고 감이 없다는 것은 태어남이 없고 죽음이 없다는 것. 물론 지금 우리에게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니라 불교에서 말하는 깨침을 성취하면 그리 보인다는 것이니, 깨치지 못하고 아모르파티를 즐기는 우리에게는 석가모니 부처님이라 해도 태어남이 있고 80세에 돌아가셨다는 죽음이 있다.
2,600년 전이라는 아득하게 먼 옛날에 살다 가신 분을 지금도 존경하는 이유는 그 분이 이룬 고요한 평화를 지금 여기서 우리도 이루고 싶다는 바람과 희망 때문이요, 2,600년 전에 돌아가셨지만 ‘오고 감이 없다’는 깨침은 여전히 싱싱하게 살아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찌 다가오는 부처님오신 날을 정성과 기쁨으로 맞이하지 않을 수 있으랴.
<홍효진 뉴저지 보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