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자(시인·수필가)
해가 길어지는 5월로 들어섰는데 유난히 바람 부는 날들이 계속되더니 흐리고 비가 내리는 날이 잦다. 꽃가루가 천지를 옐로우 장막으로 씌워주더니. 폭우를 동반한 비바람, 뇌성이 지나가면서 건물도 길도 자동차들도 특급 세차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 비바람이 훑어준 공기가 그렇게 맑을 수가 없다. 신선한 공기로 호흡하는 기쁨 또한 일상에서 잃어버리고 있었던 것들 중 하나이다. 숲길에서 한참 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풀밭에 누가 잃어버린 것인지 열쇠꾸러미가 눈에 뜨인다. 누가 잃어버린 것일까. 열쇠를 잃어버리신 분은 얼마나 당혹스럽고 막막할까. 다행히 산책 중이시던 젊은 분이 얼른 열쇠꾸러미를 들고 관리 사무실로 뛰어간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살면서 잃어버렸던 물목들이 하나 둘 떠오른다. 반지에 안경이며 우산, 전화기는 잃어버리고 도로 찾은 적도 여러 차례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소지품들을 도로 찾았을 때의 안도와 기쁨을 오늘 열쇠를 잃어버리신 분에게도 전해지기를 빌어본다.
어른이 되고 노년으로 들어서면서도 늘상 기다려줄 것만 같았던 시간이라 가끔씩 탕진하듯 써버린 시간들도 살아가면서 잃어버린 것들 중이 하나로 떠오르곤 한다. 멀리 떨어져 있는 피붙이에게 긴 안부편지를 쓰고 싶다는 생각도 잠시 책상에 앉으면 습관처럼 컴퓨터부터 열게 되면서 잃어버리게 된다. 기적소리가 들리는 밤이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먼 길을 떠나곤 한다. 야간 중고등학교 교사로 봉사하던 시절, 아이들에게 눈물나는 시를 읽어주고, 시대상이 안타까워 시를 써보곤 했던 아슴푸레한 시간들을 세월 두레박에 길어 올린다. 무엇으로도 환산할 수 없는 시간들이 가슴 떨리게 설레는 탓에 혹여 헤프게 흘러버린 시간 조각들을 주워 올리기라도 할 듯 흠칫 뒤를 돌아보곤 한다, 대학시절 시국 불안정이 얼기설기 얽혀버린 그 시절이 도무지 늙을 줄 모르고 싱싱하게 떠오름을 막을 길이 없다. 어른이 되고 노년이 저 만치 인줄 알았는데 잠깐 오수에 젖었다 깨어보니 서리 앉은 할머니가 되어있다. 생의 깊음 속에 흐르는 강줄기가 시리게 마음을 적시운다.
현대인들이 잃어버린 것 중 하나가 새벽이다. 도시의 밤은 대낮보다 밝고 휘황하다 보니 밤하늘에 깃든 빛나는 별을 바라볼 일이 없어지고 밤하늘도, 별도 어둠조차 잃어버린 리스트에 오르고 말았다. 하늘을 마음껏 날으는 새들도 잃어버린 것이 있을까, 쉼 없이 출렁이며 아우성대는 바다도 잃어버린 것이 있을까. 더불어 살아가는 산의 수목 한 그루 한 그루도 잃어버린 것들이 안타까워 무력함을 가없이 여겨달라는 간곡한 기도가 날마다 올려지고 있음을 본다. 기도로 무릎 꿇은 인생들의 간절한 모습과 오버랩된다. 묵상 시간 앞에 마음을 모으면 살면서, 하루 사이에도 잃어버린 여러 일들이 떠오른다. 일상 속에 잃어버린 맑은 음이 찾아 들기도 하고, 맑은 음으로 전신을 전율시키기도 한다. 마음 저변에 자리잡고 있는 고향은 늘 그렇듯 잃어버린 시간에 주춤하니 자리하고 있고, 향수는 이렇듯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나서게 한다. 그리움은 소원했던 관계를 회복시켜 주기도 하고 기다림은 가슴 응어리를 녹여주고 평안이 자리하게 해준다. 잃어버려도 좋을 일들도 생의 여정에서 만나게도 된다. 관계의 문이 닫혀버린 일에도 어쩌면 하늘이 외면하시거나 원하시지 않는 일이구나 하기로 했다. 이처럼 내가 굳게 세운 뜻도 무던히 애쓰고 매달려보지만 이도 저도 길이 막혀버리면 이 또한 천지 주제 되시는 그 분이 원하시는 길이 아니구나 하고 접기로 한적도 많지만 후에 깨닫게 된 신비한 불가사의에 감사가 넘치는 놀라움을 맛보았기에 이론이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묘한 힘을 굳게, 깊이 의지하게 되었고 희망을 놓지 않게 된 기억이 새롭다.
일상 속에서 상대의 마음을 들어주려는 배려의 마음도 현대인이란 가림 막에 가려 점점 잃어버린 것들의 대열에 끼어들고 있다. 상대의 생각을 들어준다는 것의 바탕은 상대의 삶의 방식까지도 받아준다는 표현이 되기도 한다. 마음을 쏟아놓은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은 위로의 마음도 내포되어 있어 말하는 이와 듣는 이의 마음이 겹쳐진다는 동기부여를 제공해주게 된다. 누구와 마주하든 귀담아 들어주는 과정 없이는 내마음도 열어 보일 수 없게 되는 것인데. 인터넷 보급으로 새로운 기능을 익히며 새로운 미디어 세계를 열어가는 일에 만족을 추구하는 시대로 급변하고 있기에 대화 기회는 줄어 들 수 밖에 없고 시대는 점점 들어주는 일로부터 멀어지고 들어주는 기능을 잃어가고 있다. 자신의 생각을 접어두고 말하고 싶어하는 사람의 말을 묵묵히 들어주는 너그러운 일이 얼마쯤 까지 가능 할까. 잃어버린 말, 시간, 비망록, 전화기. 열쇠, 반지, 안경 등 살면서 잃어버린 것들은 셀 수 없이 많지만 그 잃어버림을 상쇄하게 해준 기적 또한 존재하기에 잃어버린 것들도 기적의 길을 터준 감사의 존재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가장 소중히 여겨온 영성회복만은 무엇보다 값지고 귀중하게 붙안고 살아가려 한다. 잃어버린 것들을 향한 그리움 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