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자(시인·수필가)
삼월의 대지에는 아직 기지개 조차 켜지 못한 생명들이 흙덩이를 뚫고 나오는 중인데 이른 아침 산책길에서 만난 하늘은 어느 물감으로도 표현 못할 파랑을 보여주고 있다. 아직 빈 가지로 남겨진 나 목 아래로는 서로의 빈 몸을 끌어 안은 가랑잎 들로 빛 바랜 색상 즐비가 가득이다. 가던 길을 멈출만큼 각별하게 감각되는 신비와 만나게 되었다. 더는 적어질 수 없을, 투명한 물방울 생성과 기온이 만들어 낸 아침이슬을 만난 것이다. 기온이 떨어지고 구름 없는 밤에 형성되는 것으로 바람기 없는 맑은 가을 날 밤, 습도가 높아지면서 맺히는 것이 이슬이다. 이슬이 맺히고 기온이 떨어진 날 남짓 남게 된 이슬을 언 이슬이라 부른다는데 3월 산책길에서 언 이슬도 아닌 투명한 이슬 방울과 조우하게 되었다. 겨울도 물러서고 그렇게 잦았던 비도 그친 산책길에서 흔치 않은 3월의 이슬을 만났다. 이슬에 젖은 숲 길에는 새 소리도 숨을 죽이고 있어 혹여 산책길 숲이, 자연의 소리를 잃어가는 건 아니려나. 살아 있음의 표징인 경이로운 소음이 사라져 간다면 종국엔 인간 만이 존재하는 고독의 시간이 찾아오는 건 아닐런지. 신음 같은 바람소리만 존재할 뿐일 텐데. 지구 별의 재난이 일상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절감 하면서, 스산한 기슭에서도 계곡의 맑은 물줄기에서도 길목 마다 봄 기운이 돌고 미윤의 움직임이 느껴짐에 감사가 출렁인다. 간간이 가랑잎 무덤이 보이는 터라 빈 가지 사이사이로 단풍이 낙엽으로, 낙엽이 가랑잎으로 내려앉게 된 지난 가을에 마음을 얹게 된다. 아쉬움을 덮느라 풍경을 관조하다 보면 풍경 스스로가 만들어내려는 걸작에 집중하고 있는 봄 날의 미세한 움직임이 수선스럽다. 계절 환승길목에서 심신을 내려놓다 보면 세상 분진이 엮어내는 소음이 잦아들고 마음도 생각도 고요해진다.
이른 아침 기온이 풀린 탓인지 풀잎에 살포시 맺힌 영롱한 이슬이 신선한 아침의 살가운 바람이 고이 고여주 듯 송알송알 맺혀 있다. 이슬 위에 가득한 빛 방울까지 갓 떠오른 햇살이 눈부시게 되 비치고 있다. 해가 뜨면 이내 사라질 이슬인데 떠나는 겨울 여운과 만나기로 약조라도 한 것일까 미묘하게 헤아릴 수 없는 달뜬 풍경이 연출되고있다. 포근한 햇살과 차갑 듯 산뜻한 바람 탓인지 소소한 것들까지 다감하게 다가온다. 미말의 입자 같은 이슬 방울은 아무리 작아도 볼 것은 다 보고 있을 것 같다. 함초롬 하게 맺힌 이슬도 제 나름 하나의 우주인 것을. 이슬 표면에 하늘이 떠 있고 구름이 흐른다. 나긋한 습도로 하여 산 길인데도 마치 우주로 들어선 것 같은 신선함에 둘러싸여 있다. 계절마다 바뀌는 자연 경관의 아름다움이 오늘 따라 연하일휘를 만난 것 같다. 안개 자욱한 날에 펼쳐지거나 노을과 어우러지기도 하는 햇살 빛결의 조화로움이여.
잎이든 열매이든 심지어는 포르르 낙화하는 꽃잎까지 이슬에 젖으면 색상이 산뜻하고 또렷해지고 감각적으로 느껴지면서 잎맥까지 유난히 드러나 보여 생생한 기운이 돋보인다. 이슬을 선명히 느껴보고 싶어 눈을 크게 뜨고 들여다 본다. 사팔뜨기가 될 만큼. 유심히 들여다 보면 온통 하늘이다. 풀숲도 길게 누워있고 산책길도 뻗어있다. 바람이 일자 우주가 잠시 흔들렸다 다시금 평온을 찾는다. 고요한 신비가 신묘하다. 조용히 이슬 표면을 뚫고 이슬 안에 잠겨보고 싶다. 수면 속으로 가라 앉 듯 깊숙이 몰두해 있는 세상은 평온과 자족이 자욱할 것이고 으슥한 평화에 감싸일 것이다. 마냥 흔들림 없는 잔잔한 이슬 방울 속에 가둬 두며 은폐 유리해 두어도 될 것 같다. 만상을 관조하기에 마침 좋은 시간속에 머물수 있겠다 싶다. 새벽 이슬이 배설해 놓은 평안과 만족한 안주를 얻은 자아의 망향 향수 일지도 모를 일이다. 남은 날들의 행진은 더디겠지만 조금씩의 전진을 이루어 가면서 떠나는 계절의 기품을 지켜보리라. 이슬에 잠겼던 산책길 햇살이 산길 깊숙히 들어서면서 습도가 사라지고 특유의 건조한 가스랑 거림으로 되돌아 앉는다.
이슬은 셀 수 없는 무리를 이루고 있어 아름답기도 하지만 홀로의 맺힘이 더욱 아름답다. 흠 없는 투명한 고요를 배우고 싶은데. 세상이란 엉겅퀴 같은 마른 땅 위에도 이슬은 골고루 내려 앉는다. 울퉁불퉁한 세상을 천신만고로 살아가고 있지만 마음 만큼은 이슬같이 동그랗게 투명하게 살아지고 싶다. 세상은 여전히 각박하고 모질다 하지만 남은 날을 다 살아낸 그 날에 당도하면 순하고 착했던 맑은 사람으로 남겨지고 싶다. 그 날에는 아마 이슬 한 방울도 나보다 클 것이다. 안식의 상징처럼 세상을 품은 투명한 애드벌룬처럼.
남은 날 동안 이슬 닮은 둥글고, 투명한 맑음을 잃지 않기를 소원 드린다. 물방울 운집이 만들어낸 초 자연적 풍광 속에 이대로 마냥 머물고 싶다. 저토록 가녀리고 연미한 자연 입자의 알갱이들이 세상을 보듬고 키워내고 있다. 이슬에 잠긴 산책길에 눈부시도록 고요한 봄의 함성이 넘쳐 난다. 평화롭고 고즈넉한 봄이 오는 길목에 여한없는 평온과 잔잔한 화목이 아슴하게 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