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백세 시대라거나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축복인가, 조롱인가.
지난주 장례식장 아닌 면허국(DMV)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운전면허증을 갱신하려고 DMV에 일찌감치 찾아갔는데 부지런한 사람들이 많았다. 내 또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엉거주춤 한쪽 눈을 가리고 시력차트를 읽거나, 사진을 촬영하려고 매무새를 고치거나, 필기시험 컴퓨터에 코를 박고 있었다.
DMV는 필기시험을 집에서 온라인으로 치르더라도 ‘수속’을 위해 꼭 DMV에 오라고 일렀다. 다른 노인들도 마찬가지였을 터이다. ‘노화상태’를 점검하고 갱신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속내다. 온라인으로 갱신할 수 있는 70세 미만과 비교하면 분명히 연령차별이다. 창구 여직원은 나에게 “생년월일이 진짜냐”고 물었다. 내가 나이보다 덜 늙어 보인다는 농담임을 나중에 깨달았다.
금년 초 면허증을 갱신한 친구가 필기시험에 세 번 잇달아 떨어졌다고 실토해서 잔뜩 겁을 먹고 나름 열심히 공부했다. 하지만 첫 번째 문제부터 틀렸다. 차가 언덕길을 오를 때 일어나는 현상으로 “컨트롤하기 어려울 수 있다”를 찍었지만 정답은 “속도가 느려질 수 있다”였다. 문제 같지도 않은 문제여서 괘씸했지만 어쨌든 턱걸이로 단번에 합격했다.
컴맹세대인 어르신들에게 컴퓨터로 시험을 치르게 하는 것부터 차별이다. 인터넷에 홍수를 이루는 예시문제들을 찾아서 공부하기가 벅차다. 99% 합격률을 장담한다며 파는 소위 ‘커닝 문제집’은 상당히 비싸다. 시험 치를 때 미리 나오는 주의사항이나 수험요령이 난삽할 수도 있다. DMV 시험관이 문제를 큰 소리로 읽어줘서 구두로 답변하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어르신들도 있다.
DMV는 고령자들이 인지능력과 사고예방 능력이 떨어져 면허갱신에 신중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맞는 말이긴 하다. 실제로 지난주 프레스노 인근에서 노인이 운전하는 픽업트럭이 중앙선을 넘은 뒤 마주오던 밴을 들이받아 농장인부 등 8명이 숨졌다. 샌프란시스코에서도 78세 중국계 할머니가 몰던 SUV가 버스정류장을 덮쳐 젊은 부부와 아기 등 일가족 3명을 숨지게 했다.
하지만 노인 운전자들의 사고율이 높다고 단정하긴 어렵다. 2019년의 경우 70세 이상 운전자는 캘리포니아 전체 운전자의 10.4%였지만 부상자를 낸 사고율은 전체의 5.5%였다. 반면에20~24세 청년 운전자는 전체 운전자의 8.1%였지만 사고율은 12.5%였고, 25~29세 연령층은 전체 운전자의 10%를 점유했지만 부상자 사고율은 12.8%였다. 모두 노인층 사고율을 크게 상회했다.
노인들의 교통사고 사망률이 높은 건 사고를 많이 저질러서가 아니라 노화현상으로 골격이 약해져 충격을 더 크게 받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노인들은 상대적으로 운전 빈도가 뜸하고 운전거리도 짧다. 나도 행선지가 한정돼있다. 마켓과 약국이 각각 1마일 미만, 교회가 7마일, 병원은 12마일이다. 아들 집이 22마일로 꽤 멀지만 대체로 내가 가지 않고 아들 가족이 찾아온다.
DMV가 70세 이상 운전자들에게 면허갱신 대면심사를 시작한 건 1978년이다. 하지만 요새 노인은 그때 노인과 전혀 다르다. 등산, 축구는 예사고 마라톤을 뛰는 어르신도 많다. 내 고교동창생 하나는 스위스에 가서 알프스를 배경으로 행글라이딩을 즐기고 왔다. 수명이 길어진 만큼 운전경력도 늘어난다. 지난 10년간 교통위반 벌금티켓을 받거나 남의 차를 들이받은 적이 없다.
앞으로 90대 운전자들이 흔해진다. 나도 그 나이까지 운전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두 번쯤 더 치를 면허갱신 땐 DMV에 가서 눈치 살피며 ‘대면 수속’을 거치지 않고 젊은이처럼 집에 앉아서 온라인으로 처리하고 싶다. 면허갱신의 기본요건은 나이가 아니라 운전기록이어야 한다. 신호등 색깔을 구분 못하거나 마켓 가는 길을 잊어버리게 되면 알아서 면허증을 반납하겠다.
<윤여춘 전 시애틀지사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