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무실이 있는 2층 건물의 올림픽길 쪽으로 밋밋한 콘크리트 벽에 얼마 전 벽화를 그려 넣었다. 붓으로 창문을 그리고 그 창문 안에서 소년이 밖을 내다보는 이미지다. 이 작업을 진행한 작가는 오랫동안 여러 공공건물에 벽화를 그려온 뮤럴 아티스트(벽화 예술가)인데 그는 그림에 등장시킬 소년의 인종을 염려했다. “케이! 주로 아시안 고객이 온다고 해서 아시안 사람만 그릴 수는 없어. 인종차별로 고소당할 수 있거든.” 그의 조언에 따라 우리는 결국 인종이 모호한 혼혈인 하나를 모델로 삼았다.
그 작가가 한번은 어느 지역병원 건물에 밝게 웃고 있는 여자 간호사 서너 명의 모습을 그려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실제 여러 날 병원 스탭들의 일과를 관찰하고, 작품에 간호사들의 성격을 더 잘 표현시킬 수 있도록 그들과 대화도 나누었다. 그가 만난 간호사들은 모두 여성이었고 벽화에 자기 모습을 그려도 좋다고 동의한 간호사들로부터는 사인도 받았다. 작가는 간호사들의 사진을 찍고 작업을 시작했다. 비 오는 날을 피해가며 석 달 이상 걸려 벽화는 아름답게 완성되었다. 천사 미소의 젊은 간호사들이 마치 벽에서 걸어 나올 듯 생동감이 넘쳤고 지나가는 환자 가족들도 좋아했다. 하지만 지금 그 벽화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지역 단체들이 당장 제거하라는 소송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한 가지. ‘4명 모두 여성모델이라 간호사는 마치 여성만의 직업인 것처럼 잘못된 인식을 불어넣은 잘못’이라는 주장이다.
성역할(젠더 롤)이 점점 민감한 주제가 됐다. 베이글 먹을 때 빠질 수 없는 필라델피아 크림치즈 회사도 그릇된 성역할 광고를 내보냈다며 소비자들이 거세게 항의하는 바람에 수백만 달러의 손해를 입었다. 광고 속 아빠는 회전초밥 같은 컨베이어 벨트 위에 지나가는 크림치즈 접시를 집으려다가 음식 벨트 위에 앉혀둔 자기 아들이 저만치 밀려가는 것도 모른다는 내용. 광고모델로 나온 귀여운 꼬마모델도, 턱수염에 후디를 입은 젊은 백인아빠 모델도 그날로 땡! ‘남성은 육아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그릇된 인식을 심어주는 내용’이 소비자들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한국 내 현실도 다르지 않다. 활명수 광고에 등장한 엄마 역할이 문제가 됐다. TV 광고 안에서 아침에 일어나 가족들 밥상 차리고 아이들 깨우고 장보기, 반찬 챙기기 등 엄마의 하루 일상 안에 표현된 일들이 ‘성차별 고정관념에 근거해 가사노동을 여성의 몫으로만 한정시켰다’는 지적을 받은 후 광고를 내렸다.
내 남편은 자가조립(DIY) 공포증이 있다. 심플한 가구나 유용한 생활도구들도 집에서 조립을 해야하는 물건이면 절대 안 산다. 그 유명한 IKEA에 저렴한 조립가구를 놔두고 매장 입구, 남들이 다 조립한 뒤에 변덕이 나서 반품한 완성품 코너만 잠깐 들러본다. 신혼 초, 그림을 벽에 걸 일이 생겼다. 남편은 망치와 각종 사이즈의 드라이버 등을 챙기고 작업용 장갑을 갖추더니 못을 박기 시작했는데 핫핫 이게 웬일? 캘리포니아의 스타코 회벽은 망치를 댈수록 구멍만 커지고 못은 절대 고정이 안 된 채 힘없이 자꾸 빠지는 게 아닌가. 당시 신혼 새댁이었던 내가 저만치서 보니 속으로 웃겨죽겠다. 가뜩이나 왼손잡이 남편의 망치질이 서툴러 보이는데다가 커다랗게 뚫어진 못 구멍 아래 마룻바닥엔 허연 횟가루만 수북하다. 열 받은 남편이 마침내 소리쳤다. “내일 사람 불러!” 이튿날 남편이 출근하고 없는 틈에 내가 못자리를 찾아 콩콩 단숨에 못을 박고 그림을 걸은 건 물론이다.
그러게나! 못 박는게 어째 남자 일인가? 성역할 고정관념은 상담실에 찾아오는 부모-자녀 세대 간 갈등의 주요 토픽이기도 하다. 남자 일 따로 있고 여자 일 따로 있다고 말하지 말자. 여자든 남자든 자기가 잘 하는 거 하면서 즐겁게 살자. <김케이 임상심리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