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희 목사
많은 사람들이 새벽기도를 사모하면서도 새벽기도에 헌신하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본인들은 여러 가지로 말합니다. 늦게 잠드는 시간이나 체질적으로 자신들이 새벽의 사람들이 될 수 없다고 투덜거리는 것도 봅니다. 그러나 생각의 차이입니다.
진심으로 새벽의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새벽에 울리는 자명종 소리를 들으며 그것을 기도에로의 부름으로 의식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의무를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그는 결코 새벽기도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고단해도 종이 울릴 때 피할 수 없는 부담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하루 새벽기도를 빠졌다고 해서 무슨 큰일이 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정말 자신을 바치는 기도의 헌신 속에서 영력을 얻었던 사람들은 그 하루를 큰일나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한국 교회는 좀더 강한 그리스도인들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따뜻한 방바닥에 기저귀나 차고 뒹굴며 젖병이나 물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들판에서 맹수들의 울부짖음을 들으며 두 손을 높이 들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자라온 영적인 인물들이 필요합니다. 지속적으로 기도에 자신을 바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환경들과 싸우지 않으려면 사람들은 결코 영적인 인물이 될 수 없습니다. 보십시오. 위대한 기도의 능력. 신령한 영력은 하루 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수아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한 순간의 기도로 태양을 멎게 하였지만 그것은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 앞에 처절하게 매달린 기도 세계 속에서 맺혀진 열매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하나님만을 찾고 그 능력과 위대함만을 바라보며 자신을 준비하는 일에 기도로 헌신 하였던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가는 결코 얼마나 오래 일하는가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신 사람 하나님이 권능력 부어 주신 사람은 한 세기 동안 이 세상의 모든 교회가 힘을 합해도 다할 수 없는 위대한 일을 추구하고 죽습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방법을 찾아다니지만 하나님은 이렇게 기도의 세게가 준비된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여호수아 10:12절을 보면 우리가 깨닫게 되는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들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붙이시던 날에….” 히브리서 성경에는 이것이 완료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모리 사람들을 붙이셨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말로 하자면 “하나님께서 아모리 사람들을 이스라엘 자손의 밥으로 만드신 날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모리 족속을 붙이셨는데 무슨 기도가 필요합니까? 하나님이 붙이신 사람들을 누가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그럴 수 있다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승리를 약속하셨어도 그 승리가 오늘 현재적으로 성취되게 하시는 것은 기도를 통해서 입니다. 약속하신 이가 하나님이시고 그 약속을 우리의 현재의 삶 속에서 성취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홀로이라지 아니하시고 성도들의 기도를 통하여 위대한 일들을 이루어 가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들에게 이 일을 이루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계획은 모두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그 위대한 계획을 이루어 가실 때, 기도하는 사람들도 만들어 놓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징검다리로 이용하사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펼쳐 가십니다. 기차는 어디든지 다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레일이 필요합니다. 공중에 레일이 깔리면 공중으로도 갈 수 있고 해저 터널을 뚫고 레일을 깔면 바다 속도 지나갈 수 있습니다. 기도와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의 관계가 이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