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자(전 숙명여대 미주총동문회장)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
꽃 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
시대의 새벽길을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의 자유를 만나
언 강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 가라
그대 눈물 이제 강물 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돌아 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 (시, 정호승)
영화, 고향의 봄을 보면서 두고 온 '내사랑, 내조국' 어느 날 문득 바람처럼 사라진 내 인생에 '쓰다만 편지를' 왜 오늘 다시 반추하는지 가슴 시리다. '고향의 봄' 군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한 인간 전두환을 보면서 ''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사람'' 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군 쿠데타로 정권을 쟁탈한 그 시절에는 조국에 없었기에 더욱 가슴 절절한 아픔이었다.
1980년 5월 18일 밤 하와이에서 특집으로 생중계한 내 고향 광주 민주화 운동, 그때를 잊을수 없다. 그날 밤 300여명이 죽고 실종자, 부상자 만 3000여명, 거리에 내동이쳐진 시체를 군화로 밟고 끌고 다닌 그날의 현장을 내 두눈으로 보았다. 신군부 전두환 정권의 비상계엄령 선포로 그 희생자는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치안부에 끌려가면 경찰의 물고문을 받았고 고향이 광주라는 사실 때문에 수없이 불려다녔다. 1980년 5. 18 광주 학살을 보면서 남편은 외교관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다음날 본국에 사표를 제출하고 소리 없이 유랑하다 조용한 시골에서 농사나 짓고 살고 싶어 아틀란타에 정착하게 되었다.
내 생전 처음 흑인 시장에서 밥장사를 하면서 무직인 남편, 3자녀를 먹여 살리는 일은 나의 몫이 되었다. 무시시한 전두환 정권의 눈을 피해 그때 한인이 600여명 사는 아틀란타에서 18년간 영주권도 없이 떠돌이 신세가 되었다. 10여년간 고국에는 소식도 전하지 못하였고 그때 나의 어머니는 우리 아이들이 어디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이라도 알 수 없을까 안타까워 하시다가 세상을 떠나셨다. 생각하면 한없는 나의 불효로 못다한 이야기를 어머니께 드리려 홀로 목화밭을 홀로 헤매었다. 군 치안부에 끌려가 사망한 서울대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 씨는 그의 유해를 임진강가에 뿌리며 ''종철아… 잘 가거레이… 아부지는 아무 할말이 없데이…'' 비통한 소리에 임진강가에 아들의 유해를 뿌리셨다. 내 사랑, 내조국에 아직도 '부치지 않는 편지'를 왜 나는 오늘 쓰고 있는지 모른다.
인류 역사를 돌아보면 독일의 히틀러, 소련의 스탈린, 한국의 전두환 그 한 사람의 독재자가 남긴 땅에는 지금도 그 독재의 잔재가 남아서 무서운 혼이 살아 숨쉬고 있다. 온 우주의 에너지는 사람의 가슴에도 지금도 살아 숨쉰다. '하늘이 무서운지 알아야 한다' 오늘 지구별 전쟁의 불씨도 독재자가 뿌린 무서운 악의 잔해임을 알아야한다. 유태인, 하마스 전쟁도 독일의 히틀러의 잔해가 만든 전쟁이었다는 사실을 신문이 보도한바 있다. 스탈린이 구 소련을 통치하면서 15.000명의 교회 사제를 처형시키고 암흑의 러시아를 만들었고 '푸틴' 같은 독재자가 전쟁을 만든 이유다 . 전두환 군부를 장악해 대통령이 된 그는 과연 누구인가…
그의 어린 손자가 '독재자의 우리 가정을 용서해 달라'는 방송을 들었다. 눈을 뜨면 사면이 돈으로 벽을 쌓았고 어린 손자가 폭로한 사실을 방송을 통해 들었다. 그는 백담사는 왜 찾아갔나… 피의 아우성을 들었는가… 그가 뿌린 피의 슬픔의 노래를 그는 들었는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전두환 정권 때문에… 난 다시 태어난 축복의 생이었다. 80년대 가난한 흑인가에서 길거리에 흩어진 수 많은 홈래스들의 대모 노릇을 하며 살았다. 머리를 깎고 나 집에 돌아갈 여비를 달라는 아이들도 있었다. 미국의 가장 밑 바닥에서 마샬이 절도범을 잡으려면 제일 먼저 찾아온 곳, 도둑, 마약에 찌들린 암흑의 음지에서 20년의 밥장사는 내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난 그곳에서 나를 다시 찾았고 하나님을 만났다.
미니 슈퍼마켓에 20여 한인 야채, 가게들이 천대를 받는 것을 참지 못해 매니저와 수없이 다투다가 난 리스 갱신을 해주지 않아 쫒겨났다. 그러나 내 생애 어느곳에서나 나의 하나님은 살아 계셨다. 지금 사는 동네도 단골 손님 소개로 살게 되었고, 비즈니스를 알지도 못한 우리에게 어디선가 사랑의 손길이 찾아왔다. 세월속이 흘러 내머리도 백발이 되었고 그날에 아픔을 되돌아 보면서 부치지 않는 쓰다만 편지를 내사랑, 내조국에 석산동 산기슭에서 소식을 전한다.
산을 입에 물고 나는 작은 새여…
사랑과 죽음의 자유를 만나
언 강 바람속으로 무덤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 그대 잘가라
그대 눈물 이제 곧 바다에 이르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돌아 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 (시 ,정호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