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의 심화는 인문학의 급격한 퇴조를 불러왔다. 특히 한국에서는 대학과 고등학교 간에 학습내용이나 목적 등에 특별한 차이가 없게 만들어 버렸다. 여기서 잠깐 1970년대 중반으로 되돌아가보자.
50년 전 어느 날, 대학 1학년 서클의 토론 주제가 다음과 같이 주어졌다.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거지를 보았다. 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이를 놓고 하룻밤을 새워가면서 토론을 했다. ‘도와야 한다. 무조건 돕고 봐야 한다. 도울 힘을 길러야 한다. 그 사람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가 중요하다. 반드시 그 개인의 잘못이라고 해야 하는가, 국가는 그 사람에게 무엇인가…’
틀린 답은 없다. 대체로 전자의 학생들은 자본주의 사회에 순응하면서 입지(?)를 이루었고, 후자의 학생들은 지금도 그 화두를 붙들고 있는 경우가 있다. 요즈음 젊은이들 중 일부라도 이런 고민들을 할 것이라고 생각은 해보지만 실제로는 어떨지 궁금하다.
당장의 현실을 보자, ‘사회적 낙오자’는 세계 도처에 없는 곳이 없다. 오히려 자본주의가 성성한 곳일수록 이런 사회적 낙오, 소외계층이 많고 심하다. 일부에서는 ‘살기 좋은 세상’이라고 하지만 세상은 평등하지도, 공평하지도 않다. 그런 생각 하는 것 자체를 좌파라고 한다. 개인의 무능과 게으름의 문제로 정리해버리면 그걸로 끝이다. 각자도생의 정글인 것이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은 근대사의 큰 사조를 선물했다. ‘자유, 평등, 박애’는 혁명의 3대 가치이고 이념이었다. 이전에도 평등에 대한 가치의 태생적 이론(천부인권론) 등이 일부 있었지만 그게 노골화된 사건이 마르크스, 엥겔스가 아이러니하게도 근대 민주주의 본산인 영국에서 행한 공산당 선언이었다. 이 때로부터 자본주의는 ‘자유’를 가져와서 심화시켰고, 공산주의는 ‘평등’을 이념화시키면서 서로 이념 싸움으로 한 세기를 보내게 된다.
그 이후 자본주의는 무한 자유에 대한 경계가 느슨해지면서 무한 경쟁의 결과주의가 빚어낸 것이 바로 오늘날의 불평등과 양극화 양상이다. 반면에 1917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은 70년도 지나지 않아 박제되어버렸다. 바야흐로 이 시대의 이념은 누가 뭐라고 하든 ‘경제와 자본’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그런 잊히고 박제된 공산주의를 보면서도 필요에 따라서 손거울처럼 반면교사로 내세우려고 하는 시대착오적인 자들이 있다. 시도 때도 없이 마이크만 잡으면 ‘자유, 자유’한다. 자유를 가지고 국민들을 겁박하다가 그도 안 되면 전쟁 운운하며 ‘금권 자본주의 독재’를 꿈꾸는 나라들이 많다. 한국은 분단의 구조적 모순으로 인해서 그럴 유혹이 유난히 많은 곳이고 그게 잘 먹히는 나라이다.
20일 무역협회가 국제통화기금(IMF) 자료를 인용한 국가별 수출입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올해 1~6월 무역수지는 누적 264억 6,700만 달러 적자로 집계됐다. 이는 IMF가 선정한 주요 208개국 중 200위다. 북한(109위)보다도 순위가 낮다. 지난해 한국의 무역수지는 역대급으로 악화됐다. 지난해 말 기준 477억 8,600만 달러 적자를 기록하며 208개국 중 198위까지 밀려났다. 전 문재인 정부의 18위에서 180계단 밀려난 셈이다. 이 정도면 낭떠러지에서 떨어졌는데도 국민들은 모르고 있다.
이런 지경에서 지난 11월 28일 대통령실은 잦은 해외 순방에 대한 국민적 지탄을 의식해서인지 ‘7조원 해외투자 유치실적’ 홍보를 하였다. 반면에 미국에 72조 투자, 영국에 33조 등 105조 원의 막대한 투자 유출을 한 매국적 행위에 대해서는 언론마저 입 닫고 있다. 국민들 각자가 알아서 혹독한 세월을 대비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강창구/메릴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