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애틀랜타
이규 레스토랑
첫광고
엘리트 학원

[단상] 묵은지

| 외부 칼럼 | 2023-11-27 14:50:17

단상, 박선주, 샌프란시스코

구양숙 부동산표정원 융자누가 스킨 케어

미국에서 김치를 담그면 며칠 가지 않아 물러진다. 1년이 지나면 흐물흐물 되는 김치들. 땅이 다르고 기후가 달라서인지 미국의 배추로는 도무지 몇 년 동안 묵혀서 먹는 묵은지의 맛을 낼 수가 없다.

 

한국에서는 먹고 싶은 각양각색의 김치들을 집에서 클릭만 하면 배달되지만, 이곳은 그럴 수 없어 참 아쉽다. 더군다나 갑자기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라도 대접하고 싶은 나는, 바로 요리할 수 있는 맛있는 묵은지만 있다면야 든든하고 참 고마운 존재다.

그 귀한 묵은지가 우리 집 김치냉장고 깊은 곳에 보물처럼 숨겨져 있다. 해마다 이 묵은지를 만들기 위해 우리 엄마는 1년 내내 재료들을 마련하신다. 그리고 겨울이 되면 정작 엄마는 드시지도 않을 김치를 얼마나 많이 담그시는지… 서울에 사는 딸, 가까이 있는 아들, 딸들에게 주기 위함도 있지만 미국에 있는 딸을 위해 최고의 재료로 김장하신다. 그리고 이곳에 오는 사람들 편에 김장김치를 보내신다. 그 김치가 우리 집 김치냉장고에 차곡차곡 쌓여 1년이 묵혀지고, 어떤 김치는 3년도 묵혀진다.

엄마는 김치를 보내시고 너무 신나는 목소리로 전화하신다. “선주야! 김치 보냈다.” 그리고 꼭 당부하시는 말씀이 있다. “이민 생활에 외롭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희 집에 찾아온다면 이 김치로 따뜻한 밥 한 끼라도 꼭 대접해 드려라…” . 

이 말씀이 늘 내 마음에는 당연함으로 새겨졌다. 엄마의 그 마음은 묵은지를 드시는 모든 분에게 말하지 않아도 전해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아삭아삭하고 깊은 맛이 나는 이 묵은지의 맛을 미국 땅에서 맛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감동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젠 그 묵은지가 몇 포기 남아있지 않다. 3년 전에 엄마가 마지막으로 보내주신 묵은지를 담은 통이 언제부턴가 가벼워지고 있다. 점점 비워지는 묵은지를 볼 때마다 내 마음이 왜 이리도 허전할까? 아마도 마지막 남은 김치를 먹는 날은… 가슴이 먹먹해질 것 같다.

오늘은 왠지 묵은지를 보며 앞으로 내가 살아가야 할 삶에, 작지만 소망 하나를 더해보고 싶다. 누군가의 나눔과 섬김으로 받기만을 기대하며 살아갔다면 이젠, 받지 못하는 서운함은 서서히 비워야 하지 않을까… 한 사람의 정성과 삶으로 만들어 낸 잘 숙성된 묵은지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더 아삭아삭해지며 깊은 맛을 내어 누군가에게 위로와 감사가 전해지는 삶으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

묵은지 안에 담긴 따뜻한 나눔의 마음은 나를 통해 흘러가 많은 이들의 삶에 또 다른 채워짐으로 담기길 소망해본다. 

<박선주/샌프란시스코>

댓글 0

의견쓰기::상업광고,인신공격,비방,욕설,음담패설등의 코멘트는 예고없이 삭제될수 있습니다. (0/100자를 넘길 수 없습니다.)

[행복한 아침] 세월 속에서 만난 새해

김정자(시인·수필가)     지난 해 연말과 새해 연시를 기해 다사다난한 일들로 얼룩졌다. 미국 39대 대통령을 역임하신 지미 카터 전 대통령께서 12월 29일 향연 100세로 별

[모세최의 마음의 풍경] 새로움의 초대

최 모세(고전 음악·인문학 교실) 새해의 밝은 햇살이 가득한 아침이다. 연휴에 분주하게 지내느라 새로움을 마주하는 희망찬 의지를 다질 새도 없었다. 새해부터 경건해야 할 삶의 질서

[신앙칼럼] 명품인생, 명품신앙(Luxury Life, Luxury Faith, 로마서Romans 12:2)

방유창 목사 혜존(몽고메리 사랑 한인교회) 지금 조금 힘쓰면 영혼이 큰 평화와 영원한 기쁨을 얻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인생을 <명품인생(Luxury Life)>이라 과감하

[리 혹스테이더 칼럼] 벼랑 끝에 선 유럽
[리 혹스테이더 칼럼] 벼랑 끝에 선 유럽

유럽은 산적한 위협의 한 복판에서 새해를 맞이했다. 정치적 측면에서 보면 기존의 전통적인 정당들이 유권자들의 들끓는 분노 속에 침몰했다. 경제는 둔화세를 보이거나 기껏해야 답보상태

[오늘과 내일] 새해를 맞이하는 마음가짐

작년 12월 마지막 남은 한 장의 달력을 떼면서 지난 1년 동안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순간에 우리는 질문해 본다. 지난 한해 동안 행복하셨습니까? 후회되고 아쉬웠던 일은 없

[정숙희의 시선] 타마라 드 렘피카 @ 드영 뮤지엄
[정숙희의 시선] 타마라 드 렘피카 @ 드영 뮤지엄

굉장히 낯선 이름의 이 화가는 100년 전 유럽과 미국의 화단을 매혹했던 경이로운 여성이다. 시대를 앞서간 아티스트이자 파격의 아이콘이며 사교계의 총아이기도 했던 그녀는 남자와 여

[에세이] 묵사발의 맛

꽃동네에서 먹은 묵사발은 생각만으로도 입안에 군침이 돈다. 처음 꽃동네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수녀님들이 꽃을 많이 가꾸며 가는 동네일 것이라는 상상을 했었다. 사막의 오아시스라는

[시와 수필] 하늘 아래 사람임이 부끄러운 시대여

박경자(전 숙명여대 미주총동문회장)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그리고 나한

[삶과 생각] 천태만상 만물상
[삶과 생각] 천태만상 만물상

지천(支泉) 권명오(수필가 / 칼럼니스트)  인류사회와 인생사는 천태만상 총 천연색이다. 크고 작은 모양과 색깔 등 각기 다른 특성이 수없이 많고 또 장단점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전문가 칼럼] 보험, 그것이 알고 싶다- 메디케어 혜택의 A B C D
[전문가 칼럼] 보험, 그것이 알고 싶다- 메디케어 혜택의 A B C D

최선호 보험전문인 예전엔 어른이 어린아이를 보고 한글을 깨쳤는가를 물을 때 “가나다를 아냐”고 묻곤 했었다. ‘가나다’가 한글 알파벳의 대표 격이 되는 것이다. 영어에서도 마찬가지

이상무가 간다 yotube 채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