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명멸한 수많은 정치인 가운데 현대 민주주의를 실천한 최고의 정치인은 누구일까. 필자는 미국 민주주의를 구한 앨 고어 전 부통령을 꼽고 싶다. 1993~2001년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부통령으로 재임한 그는 2000년 대선에서 스스로(?) 고배를 들었다. 당시 개표 절차 및 결과는 격렬한 이슈였지만 깔끔하게 승복하고 조지 부시 대통령의 당선을 축하했다. 유권자 수는 1억 명이 넘는데 단 500표 차 패배였다. 불복으로 재검표 및 사법 판단 등이 진행될 경우 혼란은 미국의 분열로 이어졌을 것이다. 국내외에서 개표 때마다 부정선거 논란에다 가짜 뉴스(disinformation)가 횡행하는 양극단의 시대에서 그는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였다. 그의 살신성인 자세는 폭력 행사까지 선동하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같은 별종 지도자가 나타나면서 ‘선거의 전설(legend of election)’이 됐다.
일찍이 프랑스의 정치학자 알렉시 토크빌은 그의 명저 ‘미국 민주주의’에서 다수의 전제(專制)정치로 인한 현대 민주주의의 허약성을 지적했고 리더십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토크빌의 예측에 가장 부합했던 현인 지도자 중의 하나로 고어를 선정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선거 승복 후 그는 대선에 재도전하는 대신 인생 2막을 열었다.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알리는 환경 운동가로 변신하면서 신선한 충격을 줬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처럼 임기를 마치고 봉사하는 삶은 어렵지 않다. 고어의 정계 은퇴는 자발적인 포기를 모르는 여의도나 워싱턴 정가에서 전례가 없는 행보였다. 정치는 내가 아니어도 되지만 지구환경은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판단이었다.
그는 1992년 상원의원 시절 환경문제를 다룬 ‘균형 있는 지구’를 출간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시대를 앞서간 주제였고 다소 생뚱맞았다. 2006년 강연을 모은 책과 영화 ‘불편한 진실’이 공개되면서 뜨거운 반향을 일으켰다. 2007년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알린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이제 그의 혜안은 시대를 선도하고 있다. 지구촌 곳곳에서 온난화·폭설·홍수 등이 일상화되는 시대에 들어서면서 기후변화 대응은 경제성장과 공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인류에게 주어진 시간은 길어봤자 5년”이라며 “싸우거나 논쟁할 시간도, 절망할 여유도 없다”고 했다.
유럽연합(EU)은 이달부터 세계 최초로 이른바 ‘탄소세’를 본격 시행한다. 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는 탄소 배출량에 따라 일종의 무역 관세를 부과하는 제도다. 수출을 위해 탄소를 줄여야 하는 녹색보호주의의 흐름이 점차 강화되고 있다. 기업의 부담이 늘어나 비용 절감 차원에서 넷제로 정책에 동참해야 함과 동시에 지구환경에 대한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넷제로 2050 기후재단’은 다음 달 9일 게오르크 슈미트 주한 독일대사 등 외국 대사들과 국내 전문가들이 참여한 가운데 ‘2023 국제 기후포럼’을 개최한다. 최근에 급변하는 탄소 중립 전략에 대한 각국의 상황을 파악하고 한국의 대응을 논의하기 위해서다. 넷제로를 미루거나 회피한다고 기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에너지 안보가 부상하면서 중국·인도 등의 국가들이 화석연료에 대한 투자를 급격히 늘려가고 있어 상황은 녹록치 않다. 내년에는 화석연료로 인한 탄소 배출량이 역대 최대치를 찍을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도 나온다.
‘신은 항상 용서한다.(God always forgives) 인간은 가끔 용서한다.(A human being sometimes forgives) 하지만 자연은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Nature never forgives)’라는 구절은 반기문 제8대 유엔 사무총장이 기후변화 대응을 강조할 때마다 제시하는 명언이다. 기후변화 대응에 대한 절박감을 이보다 강렬하게 비유할 수는 없다. 자연이 인내하는 시간이 그렇게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인간이 나서지 않으면 자연이 나설 것이다.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현명한 해결책을 찾아야 할 시점이다.
<남성욱 고려대 통일융합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