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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슬픔의 에너지

지역뉴스 | 외부 칼럼 | 2026-03-09 11:04:02

수필, 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슬픔의 에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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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

 

여든 네 살 할머니가 스스로 양로원을 찾았다. 남은 생을 먼저 떠난 남편을 그리워하며 덧없이 흘려보내지는 않겠다는 할머니만의 결단이었다. 나는 그 모습에서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삶의 숭고함을 느꼈다. 누군가는 이를 고독한 뒷걸음질이라 할지 모르나, 내게는 남은 삶을 제 힘으로 가꾸겠다는 뜨거운 의지로 읽혔다.

 

할머니의 삶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남편은 전쟁 후유증으로 마음의 병을 앓던 사람이었다. 아픈 남편을 대신해 가장으로 살아오며 겪었던 눈물이 터질 것 같은 그 시린 사연들을 할머니는 그저 담담하게 들려주었다. 왜 나만 이렇게 힘들어야 하냐며 고단한 삶을 탓할 법도 한데, 할머니는 상실을 기꺼이 껴안으며 새로운 보금자리를 스스로 선택했다. 대단한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삶의 가치를 아는 사람만이 내릴 수 있는, 인생의 마지막 장을 우아하게 매듭짓는 용기였다.

 

린다 할머니를 만난 후 나는 슬픔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었다. 슬픔은 감정의 극한이 아니라, 다음 문장을 더 단단하게 잇기 위해 잠시 고르는 숨표 같은 거구나. 더 나아갈 수 없는 막장이 아니라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다시 뛰게 만드는 에너지도 될 수 있구나. 비어 버린 펌프에 새 물을 끌어올리는 마중물처럼, 슬픔이 새로운 물줄기를 트는 힘이 될 수도 있구나. 도저히 놓을 수 없던 과거를 기꺼이 흘려보내며, 다음 계절로 갈 수있는 동력이 되는 구나. 맞다. 마른 나무가 불길을 만나야 뜨거운 열을 내듯, 마음을 태우는 슬픔의 고통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표다.

 

린다 할머니의 선택 역시 슬픔에 드잡인 결과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슬픔을 동력 삼아 주인공으로서 직접 써 내려간 주도적인 다음 장이었다. 뇌는 슬픔이라는 통증을 빌려 우리에게 간절한 메시지를 보낸다. "이제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다음 계절로 건너가라"는 다정한 신호다. 하지만 정작 건너가야 할 길목을 놓치고 있는 것은 바로 슬픔에 매몰된 우리들 자신이다.

 

마음이 병들면 몸도 시든다는 말은, 거꾸로 생각하면 장작개비 같은 마음이래도 정성껏 가꾸면 삶에 다시 싱싱한 생기가 돌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슬픔이라는 캄캄한 터널 속으로 두려움 없이 손을 뻗어, 그 끝에 숨겨진 삶의 의미들을 하나 둘 찾아내 햇볕 아래 꺼내 놓는 것. 그 지극한 정성으로 고통의 허물을 벗고 '진짜 행복'을 찾아 나서는 것, 이야 말로 나이 듦에서 가장 지혜로운 선택이 아닐까. 

 

할머니의 꼿꼿한 모습은 내 인생의 마지막 각본을 고쳐 쓸 펜을 쥐어 주었다. 무엇보다 슬픔은 내 인생을 마비시키는 불행이 아니라 삶에 다시 불을 지피는 에너지도 될 수 있다는 희망에 마음이 놓인다. 앞으로 내게도 닥칠 상실의 슬픔 역시 나를 더 온전하게 빚어내는 마지막 손길이 될 것이라는 확신 덕분에, 내 인생의 끝자락이 예상보다 훨씬 더 따스할 것만 같다. 슬픔마저 삶을 밝히는 에너지가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나는 남은 미래의 평온함을 기쁘게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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