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애틀랜타
첫광고
김성희 부동산
이규 레스토랑

[수필] 슬픔의 에너지

지역뉴스 | 외부 칼럼 | 2026-03-09 11:04:02

수필, 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슬픔의 에너지

권순상 노흥성 부동산 470-218-6136표정원 융자미국 크래딧 교정

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

 

여든 네 살 할머니가 스스로 양로원을 찾았다. 남은 생을 먼저 떠난 남편을 그리워하며 덧없이 흘려보내지는 않겠다는 할머니만의 결단이었다. 나는 그 모습에서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삶의 숭고함을 느꼈다. 누군가는 이를 고독한 뒷걸음질이라 할지 모르나, 내게는 남은 삶을 제 힘으로 가꾸겠다는 뜨거운 의지로 읽혔다.

 

할머니의 삶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남편은 전쟁 후유증으로 마음의 병을 앓던 사람이었다. 아픈 남편을 대신해 가장으로 살아오며 겪었던 눈물이 터질 것 같은 그 시린 사연들을 할머니는 그저 담담하게 들려주었다. 왜 나만 이렇게 힘들어야 하냐며 고단한 삶을 탓할 법도 한데, 할머니는 상실을 기꺼이 껴안으며 새로운 보금자리를 스스로 선택했다. 대단한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삶의 가치를 아는 사람만이 내릴 수 있는, 인생의 마지막 장을 우아하게 매듭짓는 용기였다.

 

린다 할머니를 만난 후 나는 슬픔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었다. 슬픔은 감정의 극한이 아니라, 다음 문장을 더 단단하게 잇기 위해 잠시 고르는 숨표 같은 거구나. 더 나아갈 수 없는 막장이 아니라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다시 뛰게 만드는 에너지도 될 수 있구나. 비어 버린 펌프에 새 물을 끌어올리는 마중물처럼, 슬픔이 새로운 물줄기를 트는 힘이 될 수도 있구나. 도저히 놓을 수 없던 과거를 기꺼이 흘려보내며, 다음 계절로 갈 수있는 동력이 되는 구나. 맞다. 마른 나무가 불길을 만나야 뜨거운 열을 내듯, 마음을 태우는 슬픔의 고통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표다.

 

린다 할머니의 선택 역시 슬픔에 드잡인 결과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슬픔을 동력 삼아 주인공으로서 직접 써 내려간 주도적인 다음 장이었다. 뇌는 슬픔이라는 통증을 빌려 우리에게 간절한 메시지를 보낸다. "이제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다음 계절로 건너가라"는 다정한 신호다. 하지만 정작 건너가야 할 길목을 놓치고 있는 것은 바로 슬픔에 매몰된 우리들 자신이다.

 

마음이 병들면 몸도 시든다는 말은, 거꾸로 생각하면 장작개비 같은 마음이래도 정성껏 가꾸면 삶에 다시 싱싱한 생기가 돌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슬픔이라는 캄캄한 터널 속으로 두려움 없이 손을 뻗어, 그 끝에 숨겨진 삶의 의미들을 하나 둘 찾아내 햇볕 아래 꺼내 놓는 것. 그 지극한 정성으로 고통의 허물을 벗고 '진짜 행복'을 찾아 나서는 것, 이야 말로 나이 듦에서 가장 지혜로운 선택이 아닐까. 

 

할머니의 꼿꼿한 모습은 내 인생의 마지막 각본을 고쳐 쓸 펜을 쥐어 주었다. 무엇보다 슬픔은 내 인생을 마비시키는 불행이 아니라 삶에 다시 불을 지피는 에너지도 될 수 있다는 희망에 마음이 놓인다. 앞으로 내게도 닥칠 상실의 슬픔 역시 나를 더 온전하게 빚어내는 마지막 손길이 될 것이라는 확신 덕분에, 내 인생의 끝자락이 예상보다 훨씬 더 따스할 것만 같다. 슬픔마저 삶을 밝히는 에너지가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나는 남은 미래의 평온함을 기쁘게 기대해 본다.

 

 

 

 

댓글 0개

의견쓰기::상업광고,인신공격,비방,욕설,음담패설등의 코멘트는 예고없이 삭제될수 있습니다. (0/100자를 넘길 수 없습니다.)

[애틀랜타 칼럼] 미래는 오늘부터 시작이다

이용희 목사 “행복이 깃들리라. 홀로 있으면서도 오늘을 내 것이라고 노래하는 사람아. 내일은 최악일지라도 그것이 대체 무엇이냐. 오늘 나는 충실한 사람을 누렸도다. 평화로운 마음으

[법률칼럼] “월요일에 내면 되겠지”… 이민 서류, 하루 차이가 자격을 가른다

케빈 김 법무사 이민 서류를 준비하다 보면 마지막 날이 주말이나 공휴일일 때가 있다. 이때 “관공서가 쉬니 월요일에 내면 되겠지”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앞으로는 이런 판단이

[행복한 아침] 익숙해짐의 양면성

김 정자(시인 수필가)    운전이 필수인 현대인의 일상을 들여다보면 출근길이면 커피를 들고 차에 오른다. 시동을 건 다음 Seat Belt 장착을 하고 rearview mirro

[재정칼럼]   천경태의 은퇴를 지키는 쇼셜시큐리티 인사이트 -  은퇴와 생활의 기초를 지키는 가장 현실적인 제도 읽기 (26)
[재정칼럼] 천경태의 은퇴를 지키는 쇼셜시큐리티 인사이트 -  은퇴와 생활의 기초를 지키는 가장 현실적인 제도 읽기 (26)

SSI 수급자의 소득 불일치 경보(Earnings Alerts)와 10억 달러 과오 납금의 진실국세청(IRS) 자료 연계 시스템의 허점과 수급자가 반드시 챙겨야 할 월별 소득 보고

[신앙칼럼] 겸손과 사랑(Humility and Love, 요한복음John 14:23)

방유창 목사 혜존(몽고메리 사랑 한인교회) [명시감상] 비로봉(毘盧峰) — 윤동주“만상을 굽어보기란-/ 무릎이 오들오들 떨린다./ 백화(白花) 어려서 늙었다./ 새가 나비가 된다.

[수필] 스와니 벼룩시장에서 돌아본 애틀랜타 한인회

박경자 (전 숙명여대 미주총회장) 새벽마다 스와니 시청 앞 광장에는 정겨운 장터가 열린다. 소박하고 허름한 나무 상자 위에는 갓 수확한 햇고구마와 무, 배추, 제철 과일들이 무심한

[전문가 칼럼] 보험, 그것이 알고 싶다 : 주택보험과 HOA, 누구의 말을 따라야 할까?
[전문가 칼럼] 보험, 그것이 알고 싶다 : 주택보험과 HOA, 누구의 말을 따라야 할까?

최선호 보험전문인 미국의 단독주택 단지(Subdivision)에 살다 보면 가장 자주 듣게 되는 약자가 있다. 바로 **HOA(Homeowners Association)**이다.

[내 마음의 시] 소식 없이 온 가을
[내 마음의 시] 소식 없이 온 가을

헬렌김 그렇게 뜨거웠던 어제도아무런 작별 인사 없었는데,오늘은소식없이 가을입니다. 공원에는 다람쥐가 분주하고한 여름 푸르렀던 나무들은파스텔을 거두어하나 둘 황금빚 옷을 준비합니다 

[애틀랜타 칼럼] 체면을 살려 주어라

이용희 목사 대개 윗사람들은 아랫사람을 대할 때 하인 다루듯이 명령하기도 하고 책망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그런 식으로 사람을 대할 때. 그 자신의 인격이 땅에 떨어지는 것을

[법률칼럼] 취업비자 10만 달러의 벽… 이제는 회사의 해고 기록까지 본다

케빈 김 법무사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취업을 준비하는 유학생에게 채용 제안은 새로운 출발이다. 그러나 지금은 취업의 기쁨에 앞서 비자 정책의 불확실성부터 따져야 한다.지난 9월

이상무가 간다 yotube 채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