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엄마는 깍쟁이 개성 출신이었다. 속이 노오란 좋은 배추를 만날 때마다 집에서 보쌈김치를 담갔는데 바깥 푸른 잎은 겉 보자기 만드는데 쓰고, 안에 들어간 하얀 속배추 위에는 갖은 고명을 올렸다. 잣, 대추, 깎은 밤, 낙지, 굴, 배…. 문제는 내용물 전체를 보자기로 싸는 과정인데 이게 생각보다 기술을 요하는 것이어서 허술하게 잘못 쌌다가는 김치보시기 안에서 보쌈이 헬렐레 풀어지기 일쑤. 행여 식당이나 남의 집에 갔다가 잘못 싼 보쌈김치를 만나면 깍쟁이 개성여인은 이렇게 비웃었다. “칠칠맞은 아낙네, 저고리 앞가슴 풀어진 꼴로 주물러놓고는 저런 걸 보쌈이라고…” 잘난 척, 개성 엄마의 보쌈은 어찌나 암팡지게 쌌는지 식탁 위에 올라온 매무새 단정한 보자기를 젓가락 끝으로 한 겹 한 겹 푸는 동안 입에 침이 고였다.
수십 년 전, 미국에 사는 자식들이 마켓에서 병 김치를 사다 먹는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엄마는 쯧쯧 혀를 차더니 손수 김치를 담가주겠다며 미국 방문길에 올랐다. 그때만 해도 김포-나성 하늘 길은 하루가 꼬박 걸리던 시절. 인편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한국사람 끼리는 서로 짐을 전달해주기도 했고 지방에 사는 가족들은 손글씨 편지와 한국산 생필품들을 챙겨 인편에 부탁하는 일이 흔했다. 그러니 깍쟁이 개성 엄마가 자식들에게 직접 물건을 가져다줄 챈스를 놓칠 리가 없다.
드디어 LA 공항 도착! 탑승자 명단이 터미널 게시판에 줄줄이 프린트로 올라오던 시절. 개성 여인 성명 아무개 확인! “걱정마라. 엄마가 짐 없이 가뿐히 갈게!” 말씀과는 달리, 마중 나간 나는 설마가 현실로 바뀌는 광경을 마주했다. 카트 하나가 굴러오기는 하는데 짐 뒤에 가린 사람 모습은 보이질 않는다. 경사로를 지나 드디어 나타난 조그만 체구의 아시안 할머니. 카트 위에는 어마어마하게 실린 짐 보따리와 더불어 누군가 부탁한 오베이션 기타 케이스, 그리고 개성에서 피난길에도 목숨 걸고 들고 나왔다는 개다리소반 하나. 상다리가 개다리 모양이라 하여 이름 붙은 개다리소반은 조선시대 명장이 손수 깎아 새긴 꽃모양이 수놓인 아름다운 작품으로 상판은 동그란 모양이다. 내가 미국으로 오기 전, 그 상 위에서 보쌈김치 해서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넌 시집은 안가냐?’ 엄마의 잔소리도 듣던 상.
상은 그렇게 둥그런 모양이 좋다. 네모 테이블보다 자리를 많이 차지하지만 둥그런 상에 모인 가족, 친구들의 자리처럼 훈훈하고 이해받는 세팅은 또 없으리라. 트렁크에 들어가지도 않는 괴상한 사이즈의 소반을 기어이 들고 오신 개성 엄마의 극성 덕분에 그때 아직 싱글이었던 나는 그 상 위에서 많은 따스한 자리 경험을 이어갔다. 미국 클래스메이트들이 놀러오면 소파 대신 리빙룸 바닥에 소반을 중심으로 둘러앉아 쥐나는 다리를 두드려가며 수다를 떨었다.
둥그런 테이블 위의 대화는 공격적이지 않고 서로 소속된 느낌을 준다. 자유롭게 생각을 펼쳐도 받아들여진다. 내 주장이 아니고 사회심리학자들의 리서치 결과가 그것을 증명한다. 내 상담실에는 둥그런 테이블을 놓았다. 내담자가 더 쉽게 마음 빗장을 풀게 하려는 배려이다. 우리 집에서도 라운드 테이블을 사용한다. 오랜 세월이 흘러 이제 개성 엄마는 세상에 없다. 그러나 살아계실 때 같이 라운드 테이블에 앉아 “네 남편한테 잘 해라. 공부만 하지 말고!” 하시던 잔소리를 그리움으로 떠올린다. 세상이 찬바람으로 느껴질 때 친지들과 라운드 테이블에 둘러앉아 함께 런치를 나누는 일보다 더 좋은 행복은 없다. 거기에 잘 익은 보쌈김치 한포기까지 얹으면 금상첨화이고.
<김케이 임상심리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