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애틀랜타
첫광고
김성희 부동산
이규 레스토랑

[전문가 에세이] 런치 투게더

지역뉴스 | 외부 칼럼 | 2023-11-02 11:51:30

전문가 에세이, 김케이 임상심리학 박사

권순상 노흥성 부동산 470-218-6136표정원 융자미국 크래딧 교정

친정엄마는 깍쟁이 개성 출신이었다. 속이 노오란 좋은 배추를 만날 때마다 집에서 보쌈김치를 담갔는데 바깥 푸른 잎은 겉 보자기 만드는데 쓰고, 안에 들어간 하얀 속배추 위에는 갖은 고명을 올렸다. 잣, 대추, 깎은 밤, 낙지, 굴, 배…. 문제는 내용물 전체를 보자기로 싸는 과정인데 이게 생각보다 기술을 요하는 것이어서 허술하게 잘못 쌌다가는 김치보시기 안에서 보쌈이 헬렐레 풀어지기 일쑤. 행여 식당이나 남의 집에 갔다가 잘못 싼 보쌈김치를 만나면 깍쟁이 개성여인은 이렇게 비웃었다. “칠칠맞은 아낙네, 저고리 앞가슴 풀어진 꼴로 주물러놓고는 저런 걸 보쌈이라고…” 잘난 척, 개성 엄마의 보쌈은 어찌나 암팡지게 쌌는지 식탁 위에 올라온 매무새 단정한 보자기를 젓가락 끝으로 한 겹 한 겹 푸는 동안 입에 침이 고였다.

수십 년 전, 미국에 사는 자식들이 마켓에서 병 김치를 사다 먹는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엄마는 쯧쯧 혀를 차더니 손수 김치를 담가주겠다며 미국 방문길에 올랐다. 그때만 해도 김포-나성 하늘 길은 하루가 꼬박 걸리던 시절. 인편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한국사람 끼리는 서로 짐을 전달해주기도 했고 지방에 사는 가족들은 손글씨 편지와 한국산 생필품들을 챙겨 인편에 부탁하는 일이 흔했다. 그러니 깍쟁이 개성 엄마가 자식들에게 직접 물건을 가져다줄 챈스를 놓칠 리가 없다. 

드디어 LA 공항 도착! 탑승자 명단이 터미널 게시판에 줄줄이 프린트로 올라오던 시절. 개성 여인 성명 아무개 확인! “걱정마라. 엄마가 짐 없이 가뿐히 갈게!” 말씀과는 달리, 마중 나간 나는 설마가 현실로 바뀌는 광경을 마주했다. 카트 하나가 굴러오기는 하는데 짐 뒤에 가린 사람 모습은 보이질 않는다. 경사로를 지나 드디어 나타난 조그만 체구의 아시안 할머니. 카트 위에는 어마어마하게 실린 짐 보따리와 더불어 누군가 부탁한 오베이션 기타 케이스, 그리고 개성에서 피난길에도 목숨 걸고 들고 나왔다는 개다리소반 하나. 상다리가 개다리 모양이라 하여 이름 붙은 개다리소반은 조선시대 명장이 손수 깎아 새긴 꽃모양이 수놓인 아름다운 작품으로 상판은 동그란 모양이다. 내가 미국으로 오기 전, 그 상 위에서 보쌈김치 해서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넌 시집은 안가냐?’ 엄마의 잔소리도 듣던 상.

상은 그렇게 둥그런 모양이 좋다. 네모 테이블보다 자리를 많이 차지하지만 둥그런 상에 모인 가족, 친구들의 자리처럼 훈훈하고 이해받는 세팅은 또 없으리라. 트렁크에 들어가지도 않는 괴상한 사이즈의 소반을 기어이 들고 오신 개성 엄마의 극성 덕분에 그때 아직 싱글이었던 나는 그 상 위에서 많은 따스한 자리 경험을 이어갔다. 미국 클래스메이트들이 놀러오면 소파 대신 리빙룸 바닥에 소반을 중심으로 둘러앉아 쥐나는 다리를 두드려가며 수다를 떨었다. 

둥그런 테이블 위의 대화는 공격적이지 않고 서로 소속된 느낌을 준다. 자유롭게 생각을 펼쳐도 받아들여진다. 내 주장이 아니고 사회심리학자들의 리서치 결과가 그것을 증명한다. 내 상담실에는 둥그런 테이블을 놓았다. 내담자가 더 쉽게 마음 빗장을 풀게 하려는 배려이다. 우리 집에서도 라운드 테이블을 사용한다. 오랜 세월이 흘러 이제 개성 엄마는 세상에 없다. 그러나 살아계실 때 같이 라운드 테이블에 앉아 “네 남편한테 잘 해라. 공부만 하지 말고!” 하시던 잔소리를 그리움으로 떠올린다. 세상이 찬바람으로 느껴질 때 친지들과 라운드 테이블에 둘러앉아 함께 런치를 나누는 일보다 더 좋은 행복은 없다. 거기에 잘 익은 보쌈김치 한포기까지 얹으면 금상첨화이고.     

<김케이 임상심리학 박사>

댓글 0

의견쓰기::상업광고,인신공격,비방,욕설,음담패설등의 코멘트는 예고없이 삭제될수 있습니다. (0/100자를 넘길 수 없습니다.)

[행복한 아침]   인생이 다 그런 거지

김 정자(시인 수필가)   건강하고 만사가 편안하게 잘 풀릴 때, 남의 힘든 불행을 엿보며 무심코 내뱉던 말 ‘인생이 다 그런 거지 뭐, 잘 될 거야 잃은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

[신앙칼럼] 중독을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붕괴와 고립에서 거룩한 위로로

방유창 목사 혜존(몽고메리 사랑 한인교회)  (Blessed Are Those Who Mourn Addiction: From Collapse and Isolation to Divi

[재정칼럼] 천경태의 은퇴를 지키는 쇼셜시큐리티 인사이트 - 은퇴와 생활의 기초를 지키는 가장 현실적인 제도 읽기 (16)
[재정칼럼] 천경태의 은퇴를 지키는 쇼셜시큐리티 인사이트 - 은퇴와 생활의 기초를 지키는 가장 현실적인 제도 읽기 (16)

사회보장국의 부정급여 방지법(PIIA) 준수 보고서와 우리의 은퇴 방어 전략올바른 자산 및 소득 보고가 은퇴 연금과 복지 혜택을 지키는 지름길입니다 천경태 (금융전문가)  공식 발

[추억의 아름다운 시] 길

마종기 시인 높고 화려했던 등대는 착각이었을까.가고 싶은 항구는 찬비에 젖어서 지고아직 믿기지는 않지만망망한 바다에도 길이 있다는구나.같이 늙어 가는 사람아,들리냐. 바닷바람을 속

[수필] F코드, 내 인생의 굳은살
[수필] F코드, 내 인생의 굳은살

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 친구에게 기타를 가르쳐주기로 했다. 희끗희끗한 머리칼 아래로, 투박해진 손끝으로 지판을 꾹 누르며 애쓰는 친구의 모습이 자못 진

[전문가 칼럼] 보험, 그것이 알고 싶다 :  주택보험에서 보상되지 않는 사고들
[전문가 칼럼] 보험, 그것이 알고 싶다 : 주택보험에서 보상되지 않는 사고들

최선호 보험전문인 새 자동차를 살 때 딜러에 가면 기본 모델만 살 것인지, 여러 옵션을 추가할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옵션을 하나둘 넣다 보면 처음 생각했던 가격보다 훨씬 비싸지는

[애틀랜타 칼럼] 논쟁에서는 이기는자가 없다

[법률칼럼] ‘신용’보다 ‘신원’…미국 금융심사의 새로운 기준

케빈 김 법무사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대출이나 신용카드를 신청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은 신용점수(Credit Score)였다. 점수가 높고 소득이 안정적이라면 승인

[행복한 아침] 별들의 여름은

김 정자(시인 수필가)   여름 날, 밤이 깊어지면 하늘을 올려다 보던 일이 일상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유년 시절 가족이 모여 저녁밥도 마당 평상에서 먹기도 하고 시원한 수박을 나

[모세최의 마음의 풍경] 미국 독립선언문의 정신
[모세최의 마음의 풍경] 미국 독립선언문의 정신

최 모세( 고전 음악·인문학 교실)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 제250주년을 맞게 된다. 미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으로서 미국의 건국이념인 독립선언문의 정신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이상무가 간다 yotube 채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