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대기업과 대중을 상대하는 민간업체의 고용주들은 원자재 구입처와 직원 채용 기준 등 회사 경영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사안뿐만 아니라, 양극화된 문화와 정치적인 이슈에 대해서도 분명한 입장 표명을 요구받는다. 여기에는 최근 중동에서 발생한 전쟁도 포함된다.
왜 이런 요구가 나오는지 이해가 가는 부분도 더러 있다. 그러나 기업들이 까다로운 쟁점에 대해 일관된 견해를 유지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보이코트나 주주들의 반란 등을 통해 기업의 태도를 바꾸려는 시도는 전혀 새로운 게 아니다. 하지만 기업들이 전문 분야나 그들의 영향권을 벗어난 사안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을 발표하지 않을 경우 소비자들과 종업원들의 분노를 사게 되는 분위기가 10-20년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이처럼 변화하는 규범의 기원을 짚어내기는 쉽지 않다.
아마도 문화 전쟁과 정체성 정치가 미국인의 생활방식에 깊숙이 스며든 탓일 수 있다. (교회, 공동체 집단, 지역 신문 등) 한때 사회적, 정치적 견해의 중앙 토론무대 역할을 담당했던 기구와 단체들의 영향력이 줄어들면서 기업의 정치화가 이루어진 것일 수도 있다. 현대의 미국인들은 가족보다 직장동료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전통적인 정치가 사내 정치(office politics)로 흘러들어가는 것은 어찌보면 불가피한 현상이다.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가 노동인구에 합류하면서 직장인들 사이에도 상당한 세대변화와 연령변화가 일어났다. 학창시절에 이들은 캠퍼스 운영자들이 학생들이 표출하는 다양한 이념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거나 비난해 줄 것으로 기대했다. 얼마 가지 않아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에 속한 학생들은 학교 당국으로부터 그들의 견해에 대한 단순한 지지가 아닌 완전한 인정을 받으려 들었다. 필자는 학생 운동가들이 대학이라는 고치에서 나와 “현실세계”로 들어섰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했다. 현실세계의 보스들은 자신들의 견해를 완전히 인정하고 확인해달라는 종업원들의 요구를 참아내지 않을 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건 성별 구분과 낙태권, 인종과 지정학 등의 분열적 쟁점에 끼어드는 것을 한사코 피했던 기업들은 이제 더 이상 그럴 수 없게 됐다. 소비자들은 “외집단”에 대한 비난, 혹은 “내집단”에 대한 기업주의 연대 성명을 요구한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근로자들 역시 같은 것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많은 근로자들은 기업의 사내 정책과 공개적인 입장이 자신들의 근로조건에 영향을 준다는 합리적인 주장을 펼친다. 예를 들어, 낙태시술을 금지한 지역에서 여성 직원의 이탈을 막으려는 고용주는 그들의 건강을 지켜줄 방법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마찬가지로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에 적대적인 지역에서 LGBTQ+ 공동체에 속한 직원을 고용하거나, 유색인종 근로자를 채용하려는 기업주들은 일터 안팎에서 인종평등을 촉진하는 조치를 약속해야 한다.
필자는 기업의 행동을 압박하는 운동가들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다. (최근 트랜스젠더에 대한 혐오감에서 비롯된 버드 라이트 보이코트의 경우처럼) 운동가들과 견해를 달리할 때에도 필자는 기업을 상대로 한 행동은 근로자들과 소비자들의 합법적 권리에 속한다고 믿는다.
기업들은 그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입장을 선택함으로써 근로자와 소비자의 집단행동에 반응한다. 널리 퍼진 정치적 주장과 달리 기업들은 사회적으로 “각성”되었거나 “반 각성” 상태에 있지 않다. 그들은 도덕적 원칙 없이 단지 가장 크고, 가치 있는 고객층과 동일한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회사 운영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복잡하고 분열적인 이슈에 의견을 내놓으라는 압박이 커지면서 가장 유리한 입장을 찾아내려는 기업의 셈법 자체가 점차 어려워지고 있다. 한 주주 집단의 압박에 반응하다보면 다른 주주 그룹이 반발한다; 이처럼 반발이 또 다른 반발을 가져오고, 결국 독재적인 형태의 정부개입을 불러오게 된다.
정치적으로 복잡하게 얽힌 이스라엘-가자 사태는 이같은 “압박 캠페인”의 결정판처럼 보인다.
먼저, 기업들과 대학 및 기타 기관들은 하마스의 이스라엘 민간인 학살을 격렬하게 비난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다. 해외에서 발생한 잔혹행위와 관련해 기업의 중역들이 도덕적 지도력을 보이거나 위안의 말을 해야할 입장에 처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제 기업들은 경찰 폭력에서 투표권과 현대판 유대인 학살에 이르기까지 모든 쟁점에 대한 견해를 밝혀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비도덕적이거나 반인륜적인 사건에 침묵, 또는 동조하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기업들은 입을 열었다.
그러자 팔레스타인이 겪는 고통에 동정적인 직원들이 같은 논리를 동원해 회사의 입장을 반박했다. 구글과 아마존을 비롯한 대기업 근로자들은 고용주측이 가자 주민들과의 연대를 밝힐 것을 요구했다. 아예 이스라엘을 향해 휴전, 혹은 다른 구체적인 조치를 요구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사내 운동권에 속한 근로자들은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한 후 침묵을 지키는 경영주는 이스라엘인의 생명이 팔레스타인의 생명보다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잠시 생각해보자. 기업의 형식적인 연대감 표현이 전쟁에서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아니다. 이같은 입장발표가 많은 주주들의 분노를 자아내지 않을까?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특히 상황 발전에 따라 기업 지도자들이 앞서 밝힌 입장을 번복해야 하는 처지로 몰리게 되면 주주들의 우려는 가중될 것이다.
무엇을 하건 기업들은 필연적으로 고객, 근로자, 투자자들 중 일부의 지지와 신뢰를 잃게 된다. 어떤 시점에 도달하면, 기업들은 다수파를 달래려는 시도를 중단하는 대신 고객과 소비자, 투자자들 사이에 마음을 상하는 사람들의 숫자를 최소화하는데 주력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한때 당연시됐던 기업들의 밋밋한 성명서가 다시 나오게 되겠지만 요즘에는 그같은 입장문이 오히려 환영을 받을 수도 있다.
<캐서린 램펠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캐서린 램펠은 주로 공공정책, 이민과 정치적인 이슈를 다루는 워싱턴포스트지의 오피니언 칼럼니스트이다. 자료에 기반한 저널리즘을 강조하는 램펠은 프린스턴대학을 졸업한 후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로 활동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