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자(시인·수필가)
우리가 살고있는 지구라는 별에서 끊임없이 생성하고 소멸하는 삼라만상에는 영원한 것이란 없다는 잠언 말씀이 유난히 뜨겁게 느껴지는 가을이다. 생물은 물론이려니와 무생물까지도 생멸의 변화를 비켜갈 수는 없는 것. 가을이 깊어가는 것도, 계절의 순환도, 깊게 맺어져 얻어진 값진 관계도, 스치듯 지나친 인연도 인간사가 엮어낸 기복과 변모도 낯선 이름의 간이역일 뿐이다. 숱한 간이역을 지날 때마다 내리시는 분들을 두고 기차는 긴 기적을 남기며 종착역을 향해 다시 떠나간다.
가을이 들어서면서 주변 분들이 한 분씩 곁을 떠나고 있다. 산책길에서 자주 마주쳤던 독일인 부부가 어느 날 부인 혼자 걷고 있기에 남편 분의 안부를 여쭤보았더니 ‘Forever Sleep’이라 하신다. 또한 같은 산책길에서 만나 뵙게 된 한인 부부께서도 한동안 뵙지 못 했다 했는데 며칠 전에 남편 분을 천국으로 떠나보내시며 천국환송예배를 드리셨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면서 남은 날들 동안만이라도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는 경고를 받은 것 같다. 예로부터 고희가 지나면 문상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전해오고는 있지만 이국에서 이방인의 삶을 공유해오던 분들의 천국 이사 길을 배웅해드리지 않을 수 없음인데 어이 없는 허망함이 밀려든다. 삶이란 애면글면 살다가 가는 것일까. 한바탕 축재였을까. 어디를 바라보며 살아왔든, 무엇을 움켜잡고 살아왔든, 종국엔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하얗게 남은 재 한 줌 남기는 것 뿐인 것을. 삶과 죽음의 갈림길로 접어드는 것이 우리 모두가 가야 할 영원한 길이 아닐까. 해서 사랑하며 살아야할 일이다.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
어느 여론 조사 매체가 ‘무슨 재미로 사나요?’란 주제로 설문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여행 다니는 재미, 돈 버는 재미, 아이 키우는 재미, 일하는 재미였다. 이게 다였던가 싶을 만큼 허망감이 밀려들었던 기억이 새롭다. 여행하고 돈을 벌고 아이를 키웠던 일들이 손에서 떠나고 매월 연금이 입금되는 재미로 산다는 분도 계신다. 정부가 효자보다 낫다고 하시면서. 가장 높이 평가 받고 싶고 오래도록 심도있게 간직하고 싶은 소중한 재미는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들을 바라보며 황홀경에 빠져 있었던 시간이었지만 이도 덧없이 지나가고 이젠 손주 만나는 재미가 으뜸이다. 효녀 딸네들을 만난 덕에 손주를 키우는 버거운 일은 면제 받은 행운을 누리고 있다. 딸 넷을 키워온 노고를 인정 받으면서 손주들까지 맡기지 않으려는 딸네들의 효심은 최상급 효심으로 인정된다.
노년기와 직면하게 되면서 정신적 육체적 변화를 겪는 사추기를 보내게 되었다. 가을로 접어들면서 아무 것도 하기 싫은 시간과 마주하게 되자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며 공원 벤치에서 시간을 보내곤 한다.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을 땐 마냥 말 없이 하는 일 없이 생각없이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두 손을 늘어뜨리고 하늘만 응시하게 된다. 엄마의 길도, 아내의 길도, 더욱이 할머니의 길도 쉬운 게 없다. 어렵기도 하고 난해했던 적도 많았다. 좋은 친구로 남겨지는 길도, 따뜻한 이웃으로 남고 싶은 길도, 믿음 소망 사랑을 잃지 않는 성도의 길을 반듯하게 걸어가는 길도 갈수록 긴장되고 어렵고 척박해진다.
조금, 아주 조금 한발짝만 더 나가도 오버 액션이 되고, 1 미리만 덜 내디뎌도 밋밋하고 무미한 냄새가 등천하는 삶이 되어버리는 난세를 겪고있다. 어느 땐 삶의 울타리가 허물어져 내려 앉아 주춧돌이 깨지고 삶을 지탱해온 질서와 체제가 와해되는 시간 앞에선 어쩔 수 없는 붕괴와 파괴를 입어버리는 피상적 시기를 건너기도 했다. 관계에서, 조직에서도 산산히 무너뜨림을 당하게 되고 본의 아닌 흩어짐을 경험하게 되고 손을 쓸 수 없을 정도의 토붕와해를 겪기도 했다. 삶의 펜스가 무너지자 그리도 곱던 무지개빛 꿈이며 화사했던 영혼의 정원도 문득 시들어가고, 가슴으로 휑하니 바람이 드나들고 다시는 건강한 두 다리로 일어서지 못할 것 같은 탈진과 소진이 무기력을 불러들이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삶의 이음줄을 잡으려 굳이 애쓰고 싶지 않은 날들이 엮여지면서 가랑잎같은 마음이 되어버린다. 얼마 동안을 우울증과 무기력에 시달리면서 무저갱으로 가라앉을 것 같은 두려움으로 어느 것에도 무엇에도 손이 잡히지 않는 절망감에 약을 처방 받아 먹어가면서 간곡함으로 버티어 왔다. 멍하니 가을 하늘을 우러르며 곧 좋아질 거야 소중했던 날들은 다 지났지만 눈물 나도록 아름다웠던 추억들도 자꾸만 흐려져 가지만 차츰 나아질 거야. 나이든 노년 아낙을 위해 위로를 아끼지 않게 된다.
존재성을 갈구하는 의지가 좌절 당했지만 진실을 추구하고 싶은 저변에 깔린 욕구가 지금껏 이루어 놓은 것과 아바돈(Abaddon) 같은 틈새를 좁히려는 의지를 붙들면서 생의 의미를 희미하게나마 붙들 수 있을 것 같은 여지가 보이기 시작한다. 지금을 살아가는 내 모습과 진실로 추구하고 싶은 내 모습의 간극을 줄이는 것이 급선무 였다. 살아간다는 것이 허공에 매어둔 밧줄에 매달린 것 같을지라도, 눈도 깜박일 수 없는 공포의 시간들이 밀려들지라도 이제 곧 곱고 화사한 단풍 마저 지고 나면 몫으로 남겨진 남은 날들을 위해 가을 독백을 읊게 될 날이 기다리고 있음이 보인다. 예쁜 낙엽들을 시집에 끼우며 낙엽들과 소담한 가을 독백을 나누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