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유창 목사(몽고메리 사랑 한인교회)
시인 윤동주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서 “가자 가자 가자/숲으로 가자/달조각을 주으러/숲으로 가자/그믐밤 반딧불은/부서진 달조각/가자 가자 가자/숲으로 가자/달조각을 주으러/숲으로 가자.”고 <희망>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희망이 없는 순간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그 희망을 시인의 마음을 담아 시로서 카타르시스를 표현한 위대한 시인입니다.
시편 73편에서 시인은 절망과 낙심 가운데서 그 좌절의 순간을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는 <희망의 카타르시스>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시 73:28). ‘왜 희망에서 멀어지고, 하나님께로부터 소원한 삶을 살고 있는가?’ 사람이 <희망의 삶>에서 동떨어진 삶을 살 때는 반드시 그 원인이 있습니다. 본 시편의 저자, 아삽은 그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원인자를 환경이나 일이나 타인에게서 찾지 않고 바로 본인 자신 스스로에게 그 원인이 있음을 <양심고백>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양심이 찔렀나이다”(시 73:21). 속담에, “정직은 최상의 방책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솔직하게 본인의 잘못을 시인하고 그 원인자를 자신에게서 타인에게 전가하는 비겁함이 아니라, 스스로 환골탈태(換骨奪胎)하는 심정으로 정직하게 자아발견하는 순간 <회복의 아침은 밝아옵니다>. 가장 치욕스러운 말은 거짓말쟁이의 말이기 때문에 아삽은 정직한 고백을 통하여 문제의 실마리를 찾았고, 마침내 그 해결은 희망의 축복으로 결실한 것입니다.
고통과 고난의 환경 속에서도 모든 원인을 그 절박한 환경, 억울한 시대 탓으로 돌리지 않고 스스로에게서 회복의 해결점을 찾았던 윤동주 시인의 모습은 오늘 시편 73편의 저자 아삽과 동일합니다. 무엇이 원인일까? 그것은 마음의 산만함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합니다. 한곳에, 하나의 목표에 올인하지 못하고 마음이 산란하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복잡다단한 염려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 사람이 하나님 대신에 잡념에 빠져있으면 그 생각이 자동적으로 산만해지기 마련입니다.
궁수가 과녁을 향하여 온전히 집중하지 않으면 과녁에 명중하지 못하고 그 화살이 실점할 수 밖에 없듯이 마음의 목표와 그 대상이 하나에 집중하지 못하고 부초(浮草)처럼 흘러가면 결국 절망과 실패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 사람은 이토록 비겁하게 변명으로 일관하고 그 잘못의 원인을 전가하는 비겁함이 생겼는가? 그것은 인류의 조상, 아담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담이 타락이전과 타락이후가 너무나 선명하게 그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타락이전의 아담은 삶이 단순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 서로 사랑함, 자연을 정복하고 다스림, 나아가서는 자연을 즐기는 삶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산만하지도 복잡하지도 않아서 집중력을 상실할 염려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타락이후의 삶은 죄를 정당화하고, 자신의 잘못을 전가하기 위해 온갖 술수를 범하고, 증오의 관계로 점철하는 순간 그가 누린 에덴동산의 평화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복잡하고 불안정한 삶의 연속선상에 노출되고 만 것입니다.
바로 잘못된 관행이 오늘 21세기의 우리의 모습에서 재현되고 있습니다. 시인 아삽은 이 해결점을 어떻게 찾았는가? 그는 자신의 복잡한 마음, 정직하지 못한 양심에서 그 잘못을 찾았습니다. 시인의 위대함은 바로 용기입니다. 예수님의 위대한 설교 중에, “들보와 티끌”이라는 설교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네 눈의 들보는 발견하지 못하면서 남의 눈에 티끌만 보느냐?”고 반문하시는 완곡어법의 메시지는 오늘날 우리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타인에게서 잘못을 찾지 말고, 자신에게서 잘못을 찾는 것이 최상급의 해결책입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말이 있습니다. 문제의 실마리는 시간을 당길수록 그만큼 지혜로운 것입니다. 하나님과 등을 돌리고 살면 우매하고 무지하고 무식하고 짐승과 같은 존재로 절락하고 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가까이 좀더 가까이 밀착하여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