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유창 목사(몽고메리 사랑 한인교회)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스가랴 선지자는 시대의 통전적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시대를 뛰어넘어서 <사람에게> 그리고, <하나님께> 대하는 생각의 두 지평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존재와 정체성을 돌아보게 하는 아주 중요한 영혼의 바이메탈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절망하고 포기하고 있어서 <과거>가 <현재>를 발목잡으려는 <집단 정체성의 회의>에 빠져 있을 때, 이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과감하게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한 희망의 선지자입니다. 팀 켈러는 이 두 지평을 깊이 숙고할 수 있는 좋은 생각의 지평을 제시합니다. “삶은 여정이요, 그 여정의 기초는 하나님을 찾고 아는 데 있다.” 항상 일을 결정함에 있어서 기준점이 근본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존재감에 대한 생각이 <사람>이라는 연약한 자아에서 출발하는 경우와 “하나님은 누구신가?”라는 정체성의 목표가 되시는 <하나님>이라는 희망의 카테고리에서 출발하는 경우로 분류되어집니다. 예수님은 <작은 일의 날>의 소중함을 <겨자씨>의 비유를 들어 공관복음서(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눅 13:19에서,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작다>고만 생각하는 <왜소 컴플렉스>에 싸여서 언제나 존재와 정체성을 <열등의식>의 테두리 안에 자신을 가두고 살아가는 자에게 예수님은 <생각의 두 지평>을 천국의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유대인의 속담에 “겨자씨 만큼이나 작다”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동서양 고금을 막론하여 인간의 의식 저변에는 이토록 <생각의 두 지평>이 있음을 증명한 것입니다. 씨앗의 첫 출발점은 <작은 것>에 시작하였지만 마침내 5 m나 되는 ‘커다란(메가)’ 거목이 되어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일 정도로 성장하는 것이 <작은 일의 날>이 이룬 것입니다. 생각의 두 지평은 ‘<존재>에 대한 자각의 기준을 어디에 두는가?’에 따라 달라지고, ‘<정체성>에 대한 분명한 목표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에 따라 그 결과는 하늘과 땅 차이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왜 스가랴는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하고 절망에서 희망으로 전환하는 <생각의 지평>에 물음표를 던졌을까? 그 분명한 해답은 판단하고 결정하는 사람의 몫입니다. 스펄전은 여기에 선명한 혜안이 되고 있습니다. “약간의 빛을 가진 사람이 더 큰 빛을 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빛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증거다.” 작은 일의 날이라 할지라도 소중히 여기는 <생각의 두 지평>은 <존재>와 <정체성>의 영광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