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죽는다. 나에게 의미 있는 고귀한 삶의 교훈을 준, 한민족을 위해 순국한 애국자는 독립운동가인 박열 의사다.
박열(1902-1974) 의사는 15세에 경기고등학교 사범과에 진학, 재학 중 3.1운동만세 시위에 가담한 혐의로 퇴학당하고 일본 도쿄로 건너가 신문배달, 인력거 끌기 등 파트타임 일을 하며 세이소 고교를 다녔다. 2차 세계대전에 패배한 일본사회는 자괴적이며 현 정치지배 세력을 배격하고 고결한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아나키즘(반제국주의) 사상이 팽배해 있었다. 박열은 아나키즘에 심취하고 친일 세력의 박멸과 일제를 붕괴시키는 독립운동에 아나키즘을 사용했다.
박열은 한일 비밀결사대 조직인 의열단에 가입하고 불영사(不榮社)라는 비밀 결사대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1923년 관동 대지진이 폭발했다.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부상하고 가산이 파괴되었다. 정부에 대한 일본 국민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았다. 일제는 재난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넣어서 일본인들이 독살당했다는 가짜 소문을 퍼트려 재일 조선인들을 속죄양으로 삼았다. 조선인 사망자가 6,661명에 이르렀다. 일본은 잘못에 대해 지금까지도 사과하지 않고 있다.
박열은 근무하는 카페에서 가네코 후미코를 사랑한다. 고아였던 후미코는 살아온 삶과 인생관이 너무 비슷해서 박열을 의지하고 적극적으로 사랑했다. 박열과 후미코는 혼인했고 1923년 10월에 히로히토 황태자의 혼례식 때 폭탄 암살을 기도한다. 그러나 폭탄 투척 직전 비밀경찰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법정에서 박열은 기개가 너무도 당당했다. 그는 사형선고를 직감하고 검찰과 판사의 모든 회유 공작을 일언지하에 뿌리치고 “천황이란 자는 강도단의 두목이다. 나는 승리자다. 영원한 승리자다”라고 큰 목소리로 외쳤다. 재판 결과는 사형 언도였다. 박열은 판사에게 4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법정에서 조선의 예복을 입겠다. 둘째 법정에서 황태자에 대한 암살 취지는 내가 선언한다. 셋째 조선어를 사용할 테니 통역관을 준비해달라. 넷째 아내 후미코와 사진을 찍게 해달라. 판사는 박열의 ‘황당한 조건’에 당황해서 총리부와 상의한다.
일본에 대한 부정적인 국제적 인식을 상쇄하고 박열을 인도적으로 대우한다는 천황의 관대한 아량을 보여주기 위해 일본은 4가지 조건을 모두 수용했다. 박열은 경찰이 보는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박열이 의자에 앉은 후 아내 후미코를 무릎 위에 앉힌 대담한 포즈로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박열과 후미코는 깔깔대고 웃으며 그들의 열렬한 사랑을 만천하에 보여주었다.
1926년 후미코는 우쓰노미아 형무소에서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사망했다. 사망 소식을 전해들은 박열은 식음을 전폐하며 후미코를 따라 죽기로 결심했다. 국제 여론을 감안한 경찰은 박열의 입을 강제로 벌려 음식을 먹이고, 혀를 깨물어 자살하지 못하게 입에 재갈을 물렸다.
22년 후인 1945년 8월15일 해방이 되어 박열 의사는 주일 미 군정청의 도움으로 귀국하게 된다. 귀국 전 서울에 있던 김구 주석으로부터 3 의사(윤봉길, 이봉창, 백정기)의 유해를 송환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박열은 미 군정청에 부탁하여 세 분의 유해를 받아 귀국해서 이승만 정부에게 전달했다. 사실,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수감된 투사들 대부분이 일제의 공갈, 협박과 회유라는 간악한 수단에 무릎을 꿇고 변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사가들은 박열 의사만이 일제에 항복하지 않고 총명한 결단으로 담대하게 승리한 독립투사이자 영웅이라고 평했다. 이승만 정부는 박열 의사와 가네코 후미오에게 건국훈장 대통령 장을 수여했다. <대니얼 김/메릴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