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애애앵~ “국민여러분 실제 공습경보를 발령합니다. 이 시각 현재 인천방면 서해안으로 북한의 전투기가 공습중입니다. 이 상황은 실제상황입니다! 신속히 안전한 방공대피소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40년전인 1983년 2월25일 오전의 긴박했던 상황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6.25전쟁 후 최초로 남한 전역을 공포로 몰아넣은 최초의 실제 공습경보가 울렸던 것이다. 나는 불과 18일후 제78기 사관후보생으로 공군교육사령부로 입소를 앞두고 있었다.
초중고생 때 한국전쟁의 참상에 대해 배울 때마다 살인적인 겨울추위의 장진호에서, 백마고지에서, 그리고 다부동 낙동강 전선에서 처절한 전투에 내몰려 인민군과 중공군의 총탄에 맞아 피어보지도 못한 청춘의 꽃봉오리를 흩뿌리며 전사해야했던 불쌍한 선배들을 생각하면서 몸서리를 치곤했는데, 이제 드디어 우리차례가 온 것인가? 하며 나도 모르게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그로부터 약 2년 후 나는 오산 미7공군 공군작전사령부에서 정보장교로 복무하던 중 오산으로 파견 나온 공군본부의 75기 선배 서경환 대위에게 헌칠한(?) 키로 운 좋게 눈에 띄었다. 본부에서 함께 제대할 그분의 동기 박성현 대위의 후임으로 천거돼 당시 대방동 공군본부의 주한외국 무관단 연락장교로 운 좋게 전속하게 된 것이다. 논산훈련소에서 훈련받고 육군 보병으로 전방에서 복무하겠거니 했던 예상과 달리 카펫이 깔려있고 에어컨과 가죽소파가 설치된 멋진 사무실에서 외국무관들을 맞으며 군복무를 이어가게 된 것이다.
제대를 6개월 앞둔 86년 2월의 어느 날, 사무실 소파에서 직속상관으로 존경하는 장영길 실장(중령)님과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눈매가 부리부리한 어디선가 눈에 익은 크고 건장한 소령 한분이 우리 사무실로 쑤욱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바로 내가 입대하기 직전 남한 전역을 긴장의 도가니로 몰아넣으며 미그 19기를 조종해 귀순한 이웅평 대위였다.
수원 제10전투비행단으로 유도 착륙해 귀순한 그는 83년 당시 무려 15억원이라는 사상 최대의 귀순 보로금을 받은 뒤 한국공군의 정보장교로 특기를 부여받고 공군대학의 정책연구관으로 복무 중이었다. 공군대학 교수의 따님과 결혼해 신대방동의 공군아파트에서 거주하면서 신혼생활을 즐기던 중이었는데 공군본부에 볼일이 있어 올 때마다 우리 무관 연락실에 종종 들르곤 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장영길 실장님이 이웅평 대위에게 귀순 이후 심문관 겸 남한생활 적응을 위한 멘토의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와 반갑게 인사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정말 소설과도 같이 또다시 전국에 실제 공습경보가 울렸다. 이번에는 심양에서 이륙한 중국공군의 J-6 폭격기가 전라북도 익산의 논에 귀순하며 불시착하느라 벌어진 소동이었다. 이웅평 대위는 참모총장실로 즉시 호출되면서 나에게 “김중위님, 우리 집에 가서 조종복을 좀 가져와줄 수 있겠습니까?”하고 부탁했다. 나는 즉시 차를 몰고 찾아가 이 대위의 부인을 만나 상황을 설명하고는 조종복을 받아와 전해주자 이 대위는 옷을 갈아입고는 참모총장실로 서둘러 올라갔다. 그것이 그와는 마지막 조우였지만 나는 눈매가 부리부리하던, 사람 좋아보이던 그의 당당했던 생전의 모습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북한에서 두 아이를 둔 기혼자였다는 이웅평 대위. 남한에서 파격적인 대우를 받으며 행복하게 살기에 부족함이 없었는데 미그기를 몰고 귀순한 평탄치 않았던 삶으로 인한 스트레스였는지 양주를 폭음하던 끝에 2002년 불과 48세의 나이에 국군수도통합병원에서 간경화로 사망했다고 한다. 그가 분단 시대의 희생양이요 풍운아로 인생을 살다 타계한지도 어언 21년. 이곳 샌프란시스코에서 고 이웅평 대위의 명복을 빈다.
<김덕환 팔로알토 갤럭시부동산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