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춘(전 시애틀 고문)
꼭 반세기 전의 7월도 올 7월처럼 무더웠다. 신혼 초였던 나는 차창 밖에서 떨떠름한 얼굴로 손을 흔드는 아내를 뒤로하고 판문점으로 향했다. 공동경비구역의 군사정전위원회 퀀셋(가건물) 회의실을 보무당당하게 걸어 3·8선을 넘은 후 북한측 판문각으로 들어가 다과를 대접받았다. 천장에서 선풍기가 돌아가는 일본제 히노(Hino) 버스를 타고 5시간 넘게 평양으로 가면서 땀을 흘렸던 기억이 새롭다.
내가 당당하게 판문점을 넘어 북한으로 들어가는 ‘행운’을 얻은 것은 당시 평양에서 열린 제7차(마지막) 남북 적십자회담 한국대표단을 수행한 기자팀의 일원이었기 때문이다.
요즘은 판문점이 관광객들에 개방돼 누구나 갈 수 있다. 특히 2018년 문재인-김정은의 남북정상회담 무대가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판문점을 임의롭게 여긴다. 하지만 정전위 퀀셋을 가로지르는 3·8선을 넘는 것은 여전히 금기다.
지난주 23세 주한미군 트래비스 킹 이등병이 나처럼 걷지 않고 뛰어서 그 3·8선을 넘어 북한으로 들어갔다. 유니폼 아닌 청바지 차림이었다. 다른 외국인 관광객들과 함께 판문점에 들어와 퀀셋 근처에 서 있다가 갑자기 “하하하”하고 웃으며 북쪽으로 내달렸다. 돌발행동이 아니라 치밀하게 계획된 도피 행각이다. 깜짝 놀란 미군 및 한국군 경비병이 추격했지만 그는 이내 판문각에 도달해 사라졌다.
킹은 문제병사로 알려졌다. 2년 근무하고도 ‘쫄병 중의 쫄병’인 이등병이다. 한국인을 폭행하고 ‘Fxxx’라는 쌍욕을 했고, 한국 경찰차량을 발길질로 파손해 선고받은 500만원 벌금형을 48일간 감방살이로 때웠다. 이번에도 불명예제대 절차를 위해 본국송환 명령을 받고 공항의 탑승구까지 갔다가 호송인들이 돌아가자 여권을 분실했다는 핑계를 대고 공항을 빠져나왔고 이튿날 판문점 관광단에 합류했다.
킹의 판문점 월북이 해프닝처럼 보이는 것과 달리 6년 전엔 북한군 오청성 하사가 북측 경비병의 총격을 받아가며 구사일생으로 월남했다. 그는 킹과 반대로 판문각 쪽에서 자유의 집 쪽으로 내달리다가 북한군 경비병에게 5발을 총격당해 쓰러졌고 한국군 경비병들이 낮은 포복으로 기어가 구조했다. 헬기에 실려 서울로 이송된 오 하사는 총상분야 최고권위자인 이국종 교수의 치료를 받고 목숨을 건졌다.
가장 극적인 판문점 월경 드라마는 1967년 이수근 사건이다. 북한 중앙통신 부사장이었던 이수근은 미군측이 대기시켜 둔 세단에 올라 북한군 초소를 돌파했다. 남북 경비병들 간에 교전이 벌어졌다. 그는 1969년 위조여권으로 홍콩을 거쳐 캄보디아로 가다가 베트남 하노이 공항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체포됐다. 그 해 처형당한 그는 2018년 사후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2중 간첩혐의를 벗었다.
킹이 판문점을 포함한 DMZ(비무장지대)를 넘어 월북한 첫 미군은 아니다. 이미 이수근 사건 전에 4명이 탈영해 각각 북으로 갔다. 킹처럼 징계를 회피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맨 마지막으로 1965년 월북한 찰스 젠킨스는 월남전에 차출되지 않으려고 탈영했다. 납치돼온 일본여자와 강제 결혼해 두 딸을 낳은 젠킨스는 40여년만에 가족과도 상봉했고 육군당국에 자수해 30일 복역으로 탈영 죄를 면탈 받았다.
우여곡절 끝에 아내와 일본에서 살고 있는 젠킨스는 월북 후 먼저 온 3명과 단칸방에서 하루 10시간씩 김일성 사상을 학습하며 얻어맞기 일쑤였다고 털어놨다. 젠킨스는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다며 김정일 정권시절엔 동료들과 영화에 동원돼 ‘악당 미국놈’ 역할을 맡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킹도 뻔하다. 자기 이름에 걸 맞는 임금님 대접은커녕 애물단지로 구박받을 터이다. 흑인인 탓에 영화에 써먹기도 마땅치 않다. 납치해온 외국여성이 없으니 홀아비로 살아야할 터이다(북한은 억류중인 외국인에게 조선여성을 짝 지워주지 않는다). 보리밥, 된장국을 앞에 놓고 그가 자주 갔다는 홍대 앞 식당의 치맥과 스타벅스 커피 생각이 간절할 터이다.
“하하하” 웃으며 월북한 그가 ‘엉엉’ 울며 후회하고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