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호 (LA미주본사 논설위원)
팬데믹이 남긴 뚜렷한 유산 가운데 하나는 재택 근무의 확산이다. 지난 팬데믹이 라이프 스타일의 변화까지 불러왔다고 할 때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끼친 영향이 개인 생활이나 기업 문화에 그치지 않는다. 도심의 오피스 빌딩과 콘도 값이 떨어지고, 직장인이 단골이던 업소의 매출이 주는 등 재택 확산으로 인한 사회경제적 파장이 작지 않다.
생각해 보면 재택은 팬데믹이 가져온 뉴 노멀이 아니다. 출퇴근 시대 전에 재택 시대가 있었다.
미국의 남쪽 땅끝 마을인 플로리다의 키웨스트에는 헤밍웨이의 저택이 있다. 이 맨션의 구입가는 8,000달러였으나 그보다 2배이상 많은 2만달러를 들여 당시에는 드문 풀장을 팠던 집이다. 헤밍웨이의 재택은 이 집에서 이뤄졌다. 수영장이 비스듬히 내려다보이는 2층 작은 방이 집필실이었다. 여기서 스페인 내전을 소재로 한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 일부를 썼고, 단편 ‘킬리만자로의 눈’을 탈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인과 바다’는 그 20여년 뒤 키웨스트 건너, 쿠바의 집에서 썼다.
LA에 왔던 작가 이문열의 강연을 들으니 그 역시 글은 집에서 쓴다고 했다. 필요한 자료가 집에 있기 때문에 집을 떠나 소설을 쓰기 어렵다고 했다. 원고 뭉치를 들고 조용한 여관에 방을 잡거나, 절방을 찾은 작가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으나 위대한 소설은 주로 집에서 쓰여 졌다. 그러고 보니 문학뿐 아니라 거의 모든 명작은 재택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모짜르트나 베토벤이 따로 스튜디오에 출근해 피아노 협주곡이나 교향곡을 작곡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새로운 사상과 학문적 성취도 재택의 산물이었다. 칸트 등 철학자들은 집에서 깊은 생각을 다듬어 냈다. 잡스의 ‘애플’과 베이조스의 ‘아마존’도 집 차고에서 시작했다. 출발은 재택이었다. 그림도 그냥 집에서 그리는 화가가 많지 않은가?
재택은 전통적인 업무 방식이었다. 산업화 시대 이후 출퇴근제가 발전했으나 지금도 아주 높은 사람은 재택 근무가 많다. 출퇴근은 적당히 높은 사람이나, 아랫사람들의 몫이라고 할 수 있다. 백악관은 흰 기둥이 인상적인 트루먼 발코니 쪽이 대통령의 침실과 생활 공간이 있는 관저다. 외관상 몇 층인지 언뜻 알기 어려운 이 4층 건물은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웨스트 윙, 영부인 전용 공간인 이스트 윙과 연결돼 있다.
한국은 더 단출했다. 철거된 구 청와대 본관은 넥타이를 메고 아래층에 내려오면 출근, 저녁에 이층 계단을 올라가면 퇴근이라는 말을 들었다. 공개된 지금의 청와대도 집무실과 관저가 걸어서 오가기에 딱 좋은 거리로 보인다. 한 울 안에 있던 집과 사무실을 분리하자 오히려 여러 말이 나왔다. 대통령쯤 되면 아무래도 재택이 낫다는 말인 것 같은데, 실상 많은 국가 원수들이 재택으로 업무를 처리한다. 이 점에서 재택은 ‘황제 근무’라고 할 수 있다. 팬데믹은 이런 재택을 보통 사람들의 근무 형태로 바꾸는 뜻밖의 변화를 이끌어 냈다.
지나고 보니 재택이 없었다면 팬데믹 때 유지하기 어려웠을 일자리가 적지 않다. 한데 모일 수 없을 때 생각해 낸 재택근무는 더 심각한 실업 사태와 사회의 마비를 막은 공신이라고 할 수 있다. 재택도 회사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집에서 일하게 했더니 렌트비 줄이고, 복사 용지 등 사무용품비와 심지어 화장지 값도 아낄 수 있다며 내심 좋아라 하는 회사가 있는가 하면, 재택 근무자에게 오피스에서 쓰는 것과 똑 같은 책걸상과 데스크 탑을 보내주고, 소액이나마 유틸리티 비를 지원하는가 하면, 점심 배달을 지원해주는 기업도 있다.
근무 방식도 차이가 크다. 종일 화면 앞에서 일할 것을 요구하는 회사는 일과가 끝나면 녹초가 된다. 감시받는 느낌이 고통스럽다. 물론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대면 회의일 때도 위의 지시와는 달리 이제 화면은 꺼 놓고 목소리만 오간다. 일은 이메일과 전화로 처리된다. 영어가 서툰 직원에게 복잡한 업무 지시를 하면 엉뚱한 일을 해 놓을 때도 있다. 오피스에 나올 때는 없던 일이다. 아무래도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직장생활의 맛 중에 하나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있다. 사람은 만나고 부딪혀야 일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IT 분야의 한 팀장 급 한인은 그의 부서 직원 중에 반 이상은 직접 얼굴을 본 적이 없다. 동유럽이나 인도 등에서 원격 근무를 하기 때문이다. 매일 출근하던 때도 동료들과 어울리는 회식은 연말에 한 번, 회식도 근무 시간에 포함시켰다. 그는 팬데믹이 풀린 후 일주에 하루는 출근하라는 회사의 방침이 못마땅하다. 자체 사옥인 회사는 에어컨을 켜면 건물 전체에 가동되고, 꼭 나와야 하는 일부 부서 직원들과의 형평성 등을 고려해 그런 것 같은데 출근은 시간 낭비일 뿐이라고 한다. 돈은 직장에서 벌고, 인간 관계는 다른 데서 맺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몇 달 전 브루클린의 한 고교생 그룹이 뉴욕 타임스에 소개된 적이 있다. 이들은 가지고 있던 스마트 폰을 구형 폴더 폰으로 바꾸고, 소셜 미디어 계정을 중단시켰다. TV를 멀리하는 대신 공원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책도 읽으며 친구들과 어울린다. 이들 ‘복고풍 10대’들은 사회와 문명의 발달이 가져오는 고립과 소외의 심화에 저항하고 있다. 재택을 보는 이들의 시각은 또 다를 것이다. 어디가 바람직한 방향 인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많은 의견이 오갈 수 있는 담론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