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석(성공회 주임신부)
오늘날 낱사람(개인)이나 대통령을 비롯하여 사회의 공적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덕목을 한 가지 들라면 퍽이나 다양한 대답이 나올 것이다. 대답으로 ‘배움’(學, Learning)은 어떨지 싶다.
얼마 전 한일정상회담을 한 윤 대통령은 일본의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나 일제 강점기 역사왜곡을 바로잡지 못하고 오히려 일본 정부의 입장만 들어주는 굴욕적 회담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올바른 역사인식의 부재다. 일제 강점기의 역사로부터 ‘배움’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개인은 물론 대통령이나 공인도 꾸준히 배워야 한다. 배움은 인격을 형성하고 삶에 깨달음을 주며 존재의 실현을 돕는다.
사회의 경제적 양극화, 진영논리, 젠더갈등, 세대갈등 등으로 갈라진 사회를 건강하고 성숙한 사회로 변화시키는 데 ‘배움’만한 것이 있을까?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배우고 때에 맞추어 익히니…” 논어의 첫 글자가 ‘배움’(學)으로 시작된다는 것만으로도 고금을 막론하고 삶에서 배움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말해준다.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외침 역시 배움을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도 배움을 말씀하셨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11:29)
배움이라는 말은 모르는 것을 알게 됨을 넘어 새롭게 알게 된 앎(지식), 덕, 가르침, 사상 등이 마음에 스며들게 하는 것을 뜻한다. 배움은 어린 학생들이나 혹은 초보자들만의 의무가 아니다. 모든 사람은 다 배우는 사람 곧 학인(學人)이어야 한다.
인생은 배움의 과정이다. 배움은 학력이나 외형적 스펙을 쌓는 것과는 다르다. 배움은 지식을 넓혀주고, 세상을 깊고 넓게 바라보며 살게 하고, 인격을 형성한다. 배움은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는 기쁨의 원천이다. 참과 거짓을 가려내는 힘과 새로운 아이디어도 배움에서 나온다. 배움은 무지로부터의 탈출이며, 새로움에 대한 끊임없는 동경이다.
배움은 존재의 실현 곧 인간 완성의 길이다. 기후위기와 챗GPT 로봇시대, 배움은 사회를 성숙하고 정의롭게 하며 사람과 자연이 조화로운 세상을 열어가게 하는 지성의 아고라(agora)다.
흔히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한다. 이 말은 조선의 문장가 유한준이 남긴 말로 “지즉위진애(知則爲眞愛) 애즉위진간(愛則爲眞看)- 알면 곧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으로 보게 되고…”의 문구를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이해하기 쉽게 고쳐서 쓴 말이다. 조선의 선비는 앎과 사랑과 봄을 하나로 보았다. 탁월한 성찰이다. 이를 한 단어로 포괄하면‘ 배움’이다. 배움은 자신과 대상을 알아감이요, 사랑함이요, 바로 봄이다.
함께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려면 진영을 떠나, 젠더를 떠나, 여야(與野)를 떠나, 노(勞)와 사(使)를 떠나 서로에게 배워야 한다. 상대방을 배움의 대상으로 인정하지 않는 흑백논리나 진영논리는 지양해야 한다.
모든 관계에는 배움이 있어야 한다. 학문, 예술, 기술, 정치 등 삶의 모든 분야의 융합과 통섭이 이루어지는 예측불가의 제4차 산업혁명 시대이다. 어느 한 사람, 어느 한 정당, 어느 한 계층이 새로운 시대를 다 대변할 수 없다.
배움은 절대자로부터 부여받은 ‘참사람’을 향한 새로운 자기 해방이요, 새로운 세상과 진리를 향한 자기 개방이다. 배움이 새 시대를 연다. 상호 배움이 시대정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