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희(LA미주본사 논설위원)
한차례의 ‘트럼프 쇼’가 미국을 휩쓸었다. 2023년 4월 4일 미국은 전직 대통령이 피고인으로 형사법정에 서는 역사적 순간을 목도했다. 초대 조지 워싱턴으로부터 46대 조 바이든에 이르기까지 230여년 동안 미국에서 대통령이 퇴임 후 혹은 재임 중 기소된 적은 없었다. 사상 초유의 사건인 만큼 뉴욕 맨해턴 대배심이 기소결정을 내린 지난달 30일부터 인정신문이 열린 4일까지 온 국민의 관심은 트럼프에 쏠렸다. 그리고 그런 관심 세례를 가장 즐긴 인물은 트럼프였다.
트럼프는 혼외정사 입막음 관련 회계장부조작 혐의로 기소되었다. ‘전직 대통령 기소’라는 거창한 타이틀과는 격이 맞지 않는 천박한 사건이다. 발단은 2016년 대선 캠페인 당시 전직 포르노 배우가 과거 트럼프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폭로하겠다고 나선 것. 트럼프는 고문변호사를 시켜 13만 달러를 주고 일단 입을 막게 한 후, 나중에 회사 수표로 변제하면서 ‘법률 자문료’라고 허위기재한 혐의를 받고 있다.
입막음 돈을 준 것이나 수표 허위기재 자체가 형사 기소감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대선에 불리한 정보를 감추려고 의도적으로 꾸민 것이니 사기에 해당하는 불법행위이며 뉴욕 주 선거법을 위반한 중범죄라고 맨해턴 지검은 주장한다.
웬만한 정치인이라면 혼외정사 케이스로 법정에 선 것 자체로 정치생명에 타격을 입는다. 하지만 트럼프는 트럼프, 진실이 어떠하든 국면 전환에 탁월하다. 기소된 순간부터 민주당의 정치탄압이라며 지지자들의 시위를 촉구했고, 플로리다 자택을 떠나 뉴욕 법정으로 향할 때는 우국지사의 비장함으로 분위기를 잡았다. “우리는 지금 미국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간을 살고 있다. 하지만 최소한 지금 이 순간 나는 사기충천하다.”
트럼프는 나르시시즘이 강한 인물이다. 언제 어디서든 자신이 중심에 있어야 만족한다. 이런 부류의 인물들이 가장 못 견디는 건 사람들의 무관심. 지난 며칠 뉴스매체들이 일제히 ‘트럼프 기소’ 이슈를 다루자 그는 신이 났다. 한동안 시들했던 자신의 존재감이 살아난 것이다. 기소가 몰고 온 트럼프 PR 효과는 대단했다. 며칠 사이 트럼프 재선 캠프에는 700만 달러의 기부금이 쏟아져 들어왔고, 나라는 둘로 갈라졌다. 지지진영은 “트럼프 아니면 죽음을”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며 결집했고, 반대진영은 “체포하라” “감옥에 가두라” “트럼프는 범죄보스”라며 결집했다. 트럼프에게 아쉬운 게 있다면 찬반 진영의 시위규모가 전 같지 않다는 것. 트럼프의 무게감은 많이 줄어들었다.
나라를 둘로 가르며, 거짓말을 밥 먹듯 하며, 분노와 미움을 부채질하며, 그가 얻으려는 것은 무엇인가. 그렇게 해서 대통령 직에까지 올랐었으니 그의 인생은 성공한 걸까. 하지만 사생활부터 기업운영까지 추문 무성한 그가 언제까지 기고만장할지는 의문이다. 섹스스캔들로 법정에 선 그를 우선 그의 가족들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 그의 아내와 자녀들은 남편/아버지로서 그를 존경하고 있을까. 친구들은 그의 편을 들어줄까. 그에게 진정한 친구가 있기는 한 걸까.
트럼프(76)보다 오래 살았고 40배 이상 더 부자인 워렌 버핏(92)은 인생을 보는 통찰력이 있다. ‘오마하의 현인’으로 불릴만하다. 자타 공인 성공한 인생을 살고 있는 그는 마이크로 소프트 공동창업자인 빌 게이츠와 함께 세계 1, 2위를 다투는 기부가로도 유명하다.
최근 AI 챗봇과의 인터뷰에서 게이츠는 “살아오면서 들은 최고의 조언은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67세의 게이츠는 인생 대선배이자 30년 지기인 버핏의 조언을 꼽았다. “결국 중요한 건 친구들이 당신을 정말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 그리고 그 우정이 얼마나 강한가라는 것”이라는 말이었다.
버핏은 한 대학 연설에서도 비슷한 말을 했다. “이 나이가 되고 보면 인생이 성공적이었는지를 측정해볼 진짜 기준은 하나다. 당신이 사랑받고 싶은 사람들 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실제로 당신을 사랑하느냐이다.” 노년에 은행구좌에 돈이 얼마가 있든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 인생은 실패작이라고 그는 말하곤 한다.
얼마나 벌었느냐, 얼마나 높이 올라갔느냐가 아니라 곁에 사람이 얼마나 있느냐가 성공의 잣대라는 것이다. 트럼프와는 완전히 다른 삶의 자세, 시선의 방향이 다르다. 트럼프는 관심의 초점이 온통 자기 자신이라면 버핏이나 게이츠는 시선을 밖으로 돌려 함께 살기를 추구한다. 전자는 배척, 후자는 포용이다.
남이야 어떠하든, 어떤 거짓말을 동원하든 내 이익만 챙기고 보자는 것이 요즘 흔한 병적추세이다.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외적 성공만 쫓는 이런 삶의 한 모델이 트럼프이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누구든 이용하고 누구든 버리는 삶이 그의 복잡한 사생활, 상습적 파산과 탈세로 점철된 기업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인종차별과 이민자차별로 저학력저소득 백인유권자들의 박탈감을 자극해 얻은 인기가 언제까지 갈 것인가. 백인주도 미국에 대한 백인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가 언제까지 힘을 가질 것인가.
기소된 트럼프를 보며 우리의 인생을 돌아본다. 무엇을 추구하며 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