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달 17일부터 언론보도에 의한 명예훼손과 관련, 지난 수십 년래 가장 중요한 것으로 평가받는 재판이 시작된다. 투표기기 제조사인 ‘도미니언 보팅 시스템’이 미 최대 보수언론인 ‘폭스 뉴스’를 상대로 지난해 제기한 16억 달러 명예훼손 소송이 그것이다. 도미니언은 지난 2020년 대선 당시 자사의 투개표 기기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얻은 표를 조작하는 데 사용됐다는 음모론을 폭스 뉴스가 반복 방송한 결과 회사에 막대한 손해를 끼쳤다며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이 소송에 대해 폭스 측은 언론자유를 규정한 수정헌법 1조에 근거해 소송 각하를 해 줄 것을 법원에 요청했다. 또한 폭스는 자사의 보도는 ‘오피니언’이 아니라 뉴스 가치가 있는 공적 인물들의 주장을 그대로 인용한 것일 뿐이라는 입장을 내세웠다. 그 공적 인물들은 트럼프와 그의 측근들이다.
하지만 지난 금요일 델라웨어 주 수피리어 법원은 폭스의 이런 주장을 일축하면서 재판을 진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따라 오는 17일부터 폭스 뉴스에 대한 명예훼손 소송이 배심원 재판으로 시작되게 된 것이다.
당초 도미니언의 승소 가능성에는 회의적인 시선들이 우세했다. 언론에게는 공익과 대중의 알 권리라는 측면에서 보도 내용의 일부가 설사 사실과 다르더라도 악의적인 게 아니라면 명예훼손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도미니언이 승소를 하려면 폭스 뉴스의 ‘실질적인 악의’(actual malice)를 입증해야 하는 데 이것을 증명해 내기란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폭스의 ‘실질적 악의’를 뒷받침해 줄만한 자료들을 도미니언이 찾아냈다. 폭스의 주인인 루퍼트 머독과 폭스 뉴스 진행자 등 핵심 인사들이 사석에서는 트럼프 지지자들이 주장하는 음모론을 ‘미친 소리’ ‘거짓’이라고 평가절하하면서도 방송에서는 이런 음모론을 그대로 보도했음을 보여주는 이메일과 문자 등을 입수한 것이다.
이 자료들은 폭스 뉴스가 트럼프의 패배를 인정하는 보도를 내보낸 후 극우 시청자들이 다른 매체로 마구 빠져나가자 수익과 시청률 감소를 우려한 수뇌부가 음모론 보도를 결정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런 만큼 폭스의 ‘실질적 악의’가 고스란히 증명됐다는 것이 도미니언의 주장이다.
지난 금요일의 판결로 도미니언이 일단 승기를 잡게 됐다는 것이 대체적인 시각이지만 재판이 배심원 재판으로 진행되는 만큼 배심원 일부의 정치적 성향이 평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조심스러운 관측도 나오고 있다. 아무튼 이번 재판은 “미국사회에서 언론을 상대로 근래 제기된 명예훼손 소송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내용의 언론보도가 과연 어느 범위까지 허용될 수 있는가에 관한 이정표적 결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언론도 기업인만큼 돈을 벌어야 하고 수익을 내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언론을 다른 일반 기업들과 차별화해 주는 것은 그것이 갖고 있는 공익성이다. 언론에 폭넓은 보도 재량권이 주어지고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 만큼 수익을 내는 방식 또한 올바른 보도와 이에 대한 뉴스소비자들의 선택에 토대한 것이 돼야 한다. 전적으로 신뢰할만한 보도를 통해 수익을 만들어 가야지 수익을 위해 진실을 왜곡하는 보도를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만약 언론이 이런 행태를 보인다면 그것은 허위·과장 광고로 상품과 서비스를 팔아 돈을 버는 기업들과 다를 바 없다. 폭스를 상대로 한 명예훼손 소송은 이 명제에 대한 사법부와 일반국민들의 판단을 묻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